30명의 파트너, 2개의 답 — 그리고 무너진 RACI
글로벌 컨설팅 기업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었다. 파트너 30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프로젝트의 최종 의사결정자는 누구입니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절반은 RACI 차트에서 ‘A(Accountable)’로 지정된 사람을 가리켰고, 나머지 절반은 ‘R(Responsible)’을 지목했다. 같은 프레임워크를 쓰고 있었지만, 누가 결정권을 가졌는지조차 합의하지 못한 셈이다.
미시간대학교와 IMD 비즈니스스쿨의 공동연구(린디 그리어, 막심 시치, 제니퍼 조던)에 따르면, RACI·RAPID·DARE 같은 의사결정 프레임워크가 실무에서 실패하는 핵심 원인은 도구 자체의 결함이 아니다. “오해, 오용, 또는 실제 행동과의 괴리”가 문제다. 한 글로벌 이커머스 매니저가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의사결정 권한 체계는 어린이 축구팀의 포지션 배치도와 같다 — 종이 위에서는 그럴듯하지만, 아무도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솔직히, 이 비유가 지나치게 예리해서 아프다. 한국 기업에서도 RACI를 도입했다가 ‘그건 누가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만 더 늘어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프레임워크를 들여왔는데 오히려 혼란이 깊어지는 역설 —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한 줄 요약: RACI·RAPID 같은 의사결정 프레임워크가 실패하는 진짜 이유는 도구가 아니라, 목표 없이 역할만 배분하고 현장 행동과 연결하지 못하는 조직의 습관에 있다.
프레임워크가 무너지는 네 가지 함정
연구팀이 밝힌 실패 패턴은 예상보다 단순하고,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문제는 목표 없는 역할 배분이다. “이 의사결정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합의하기 전에 “누가 A이고 누가 R인가”부터 정한다. 결과적으로 역할 싸움이 벌어진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운전석부터 차지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영역 다툼은 거의 언제나 목표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그 다음은 문서화의 착각이다. 리더가 RACI 매트릭스를 만들어 공유하면 구성원들이 이를 따를 것이라고 가정한다. 현실은? 대부분 한 번 훑어보고 잊는다. 공동으로 만들지 않은 프레임워크는 ‘남의 규칙’이다. 당연히 내면화되지 않는다.
여기에 역할 정의의 혼란이 겹친다. 앞서 언급한 컨설팅 기업 사례가 대표적이다. ‘Accountable’과 ‘Responsible’의 경계를 조직 내 절반이 반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이 핵심이다 — 같은 단어를 쓰면서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프레임워크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혼란의 증폭기가 된다.
마지막은 고착된 권한 배분이다. 한번 ‘A’로 지정된 임원이 모든 의사결정에서 계속 ‘A’를 맡는다. 의사결정의 성격이 바뀌어도, 정보에 더 가까운 실무자가 있어도, 관성적으로 같은 사람이 결정권을 쥔다. 연구팀은 이에 대해 명확한 처방을 내놓는다. “리더는 연간 자신이 직접 내릴 의사결정 4개를 선별하고, 나머지는 해당 정보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위임하라.”
50%
같은 RACI 차트의 ‘최종 결정자’를 서로 다르게 지목한 파트너 비율
미시간대-IMD 공동연구, 2026
1,000명+
‘좌절된 임팩트’ — 조직이 의미 있는 기여를 막는다고 느끼는 미국 근로자
HBR 조사, 2026
3개 이하
엘리트 코치가 고압 상황에서 허용하는 최대 정보 수
럭비 월드컵 우승 코치 인터뷰
엘리트 코치에게 배우는 — 프레임워크 없는 의사결정
흥미롭게도, 가장 극한의 의사결정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프레임워크에 의존하지 않는다. NFL·NBA·프리미어리그·라리가·럭비 월드컵의 엘리트 코치 11명을 인터뷰한 최신 연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의 의사결정 방식은 ‘준비 → 실행 → 학습’의 사이클로 요약된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시나리오를 미리 리허설한다. 한 럭비 월드컵 우승 감독은 “결정이 필요한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사전에 해답을 찾아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는 감정을 조절하며, 미디어 반응이나 외부 시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 하나’에만 집중한다. 유럽 프로축구 감독의 경고가 인상적이다. “판단을 가장 흐리게 만드는 것은 언론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결정 이후에는 틀렸을 가능성을 정상화한다. 한 NFL 코치의 습관적 반응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내가 틀렸을 수 있다. 하지만 다음번을 위해 항상 배운다.” 또 다른 럭비 코치는 “즉흥적 판단에서 오류가 날 가능성은 높다”고 인정하면서도, 결정 프로세스 자체가 올바랐다면 결과와 무관하게 좋은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좋은 결정은 여러 개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이 핵심이다.
사례 — MLB 월드시리즈한 메이저리그 감독은 월드시리즈 전날 밤, 코칭스태프와 함께 타순 전략을 사전 결정했다. 구원투수 교체 시나리오까지 포함한 컨틴전시 플랜이었다. 다음 날 7회, 예상했던 정확한 상황이 펼쳐졌고 감독은 미리 계획한 대로 실행했다. 결과는 우승을 확정짓는 홈런이었다. 이건 직감이 아니라, 사전 준비가 만들어낸 ‘즉각적 실행’이었다. 외부에서 보기에 천재적 직관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전날 밤의 치밀한 시뮬레이션이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코치들이 정보를 줄이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챔피언십 우승 럭비 코치는 “절대 세 가지 이상의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NBA 코치 역시 “너무 많은 사람에게서 너무 많은 정보를 받으면 판단이 흐려진다”고 경고했다. 이건 좀 아이러니하다 —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최근 HR 트렌드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많을수록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가정, 과연 맞는 걸까.
한 NBA 코치는 전술 데이터를 분석가가 아닌 어시스턴트 코치에게 먼저 정리하게 한다. 숫자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맥락을 아는 사람의 필터링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이 접근법은 기업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로벌 투자회사의 CRO(최고위험관리책임자)는 중앙은행 금리 결정에 대비할 때, 보고 형식을 철저히 표준화했다 — 노출 수준, 하방 시나리오, 행동 트리거를 정해진 포맷으로만 보고받았다. 이러한 규율 있는 준비 덕분에 시장이 움직였을 때 차분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왜 ‘결과 복기’가 아니라 ‘프로세스 복기’인가
대부분의 조직은 의사결정 이후 ‘결과’를 평가한다. 매출이 올랐는지, 프로젝트가 성공했는지, KPI를 달성했는지. 그런데 엘리트 코치들은 다르다. 이들은 결과와 무관하게 의사결정 ‘과정’을 복기한다.
한 유럽 프로축구 감독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새 선수를 영입한 후 팀 적응에 실패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 감독은 영입 실패 자체보다 전체 리크루팅 프로세스를 재설계하는 데 집중했다. “정보를 어떻게 수집했는가, 역할 정의는 명확했는가, 적합성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했는가” — 이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시스템을 뜯어고쳤다.
제약회사 리더의 사례도 비슷한 교훈을 준다. FDA에 의약품 제출을 지연하면서 추가 안전 데이터를 확보했고, 결과적으로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리더는 올바른 결과에도 불구하고 프로세스의 허점을 인정했다. 안전 이슈가 발생하면 즉시 본인에게 직보하는 체계, 그리고 일정 변경 시 즉각 커뮤니케이션하는 프로토콜을 새로 도입했다. 결과가 좋았어도 프로세스를 개선한 것이다.
아쉽다 — 한국 기업의 의사결정 복기는 대부분 ‘왜 실패했는가’에 머문다. 성공한 의사결정의 프로세스를 분석하고 시스템화하는 조직은 드물다. 성공을 ‘잘한 결과’로 넘기지 않고 ‘왜 잘 됐는지’를 구조화하는 습관, 이것이 엘리트 코치들이 반복적으로 높은 수준의 판단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현장에서 작동하는 의사결정 인프라란
프레임워크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종이 위의 프레임워크를 현장의 행동으로 연결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방향은 세 가지 전환으로 압축된다. 역할보다 목표를 먼저 합의하라. 의사결정의 목적과 성공 기준을 정의한 후에 역할을 배분해야, ‘A인가 R인가’ 논쟁이 사라진다. 이때 핵심 질문은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놓친 선택지는 없는가?”, “이 결정은 되돌릴 수 있는가?”다.
프레임워크를 함께 설계하라. 리더가 만들어 배포하는 방식은 실패 가능성이 높다. 이해관계자가 함께 만들어야 비로소 ‘우리의 약속’이 된다. 역할 정의도 마찬가지 — 같은 용어를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지 반드시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권한은 위계가 아니라 전문성에 맞춰 재배분하라. 정보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결정권을 갖고, 리더는 연간 핵심 의사결정 4개만 직접 챙기고 나머지는 위임하는 구조가 더 효과적이다.
결국 의사결정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프레임워크를 쓰느냐가 아니라, 그 프레임워크가 현장의 행동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느냐다. RACI 매트릭스가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면, 그건 프레임워크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이 ‘결정하는 법’을 결정하지 않은 것이다.
💡 실무 시사점: RACI를 벽에 붙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레임워크 도입 전 목표 합의 → 이해관계자 공동 설계 → 역할 정의 검증(같은 단어를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지 확인) → 정기적 권한 재배분의 사이클을 운영하고, 결정 후에는 결과가 아닌 프로세스를 복기하는 학습 루틴을 정착시켜야 한다. 엘리트 코치들처럼 정보는 줄이고, 맥락을 아는 사람에게 필터링을 맡기며, ‘틀릴 수 있다’를 정상화하는 문화가 좋은 의사결정의 토양이 된다.
#의사결정프레임워크#RACI#리더십#조직설계#HR트렌드
참고 링크
- HBR, “Why Decision-Making Frameworks Fail” (2026)
- HBR, “How Elite Sports Coaches Make High-Pressure Decisions” (2026)
- HBR, “Our Favorite Management Tips on Decision-Making” (2026)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