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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신입사원의 일을 가져갔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025년 하반기부터 글로벌 대기업들의 신입 채용 공고가 눈에 띄게 줄었다. 컨설팅, 금융, 법률, 소프트웨어 — 전통적으로 주니어를 대량 흡수하던 산업들이 일제히 채용 규모를 축소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해당 기업들의 실적은 멀쩡했다. 일부는 오히려 개선됐다. 매출, 영업이익, 1인당 생산성 — 어떤 지표를 봐도 경보등이 켜지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AI가 신입의 업무를 대체해도 기업 이익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면, 인적자본 파이프라인이 무너지는 순간을 시장은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감지할 수 없다 — 이것이 AI 시대 인적자본 함정의 진짜 위험이다.

한 줄 요약: AI 자동화의 가장 위험한 속성은 생산성 하락이 아니라 ‘이익 신호의 소멸’이다. 기업 이윤이 인적자본 파이프라인 붕괴를 경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함정에 빠진 사실을 깨닫는 시점에는 이미 늦었다.

잡일이 아니라 커리큘럼이었다

컨설팅 펌의 주니어 애널리스트가 하는 일을 떠올려 보자. 시장 데이터 수집, 엑셀 피벗, 슬라이드 초안 작성, 미팅 노트 정리. 겉보기에는 단순 반복이다. AI가 대체하기에 완벽한 업무 목록처럼 보인다. 실제로 2023년 이후 많은 조직이 이런 업무를 LLM 기반 도구로 자동화했고, 그 결과 주니어 인력 수요가 줄었다.

그런데 컬럼비아대·시카고대 연구진이 제시한 모델은 이 ‘잡일’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석한다. 신입이 수행하는 업무(entry-level tasks)는 단순 노동이 아니라 인적자본 축적의 커리큘럼이라는 것이다. 변호사가 수천 건의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패턴 인식 능력을 키우고, 데이터과학자가 수작업 전처리를 반복하면서 데이터 감각을 체득하는 것 — 이 과정이 바로 학습에 의한 실행(learning-by-doing)이다. 모델의 수식으로 표현하면, 노동자의 인적자본 성장률은 그가 수행하는 업무 범위에 비례한다. 업무 범위가 줄면 학습률도 떨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프레이밍이 한국 기업의 관행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본다. 한국 대기업의 신입사원 교육은 ‘현장 투입 전 집합 교육’에 집중되어 있고, 실제 업무 현장에서의 학습은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교실이 아니라 업무 자체가 커리큘럼이며, 그 커리큘럼을 AI에 넘기는 순간 학습 경로가 사라진다.

같은 기술이 만드는 정반대 미래

이 연구에서 가장 도발적인 발견은 복수 균형(multiple equilibria)의 존재다. 같은 AI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경제가 어떤 균형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정반대로 갈라진다.

고학습 균형

AI가 업무 경계(task frontier)를 확장 → 신규 업무 창출 → 학습률 상승 → 더 숙련된 시니어 → 선순환

NBER w35157 — Proposition 3 시뮬레이션

저학습 균형

AI가 기존 업무를 자동화 → 업무 범위 축소 → 학습률 하락 → 인적자본 함정 → 악순환

NBER w35157 — Figure 2-4 기반

5배 이상

고학습 균형에서 노동자가 매니저 전환 전 축적하는 인적자본 배수 (저학습 균형에서는 거의 즉시 전환)

NBER w35157 — Figure 2 x* 비교

고학습 균형에서는 AI 기술의 가격이 하락할수록 기업이 새로운 업무 영역을 개척하는 비용도 줄어든다. 시니어 매니저의 인적자본과 AI 기술이 결합하여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업무가 만들어지고, 주니어는 이 새로운 업무를 수행하면서 학습한다. 기술이 학습을 촉진하는 구조다.

저학습 균형에서는 정반대다. AI 기술 가격이 하락하면 기존 업무의 자동화가 가속된다. 주니어가 수행할 업무가 줄어들고, 학습률이 떨어지며, 숙련된 매니저가 배출되지 않는다. 매니저 풀이 빈약하니 새로운 업무 영역도 개척되지 않는다. 기술이 학습을 파괴하는 구조다.

핵심은 이 두 균형이 항상 쌍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어떤 기술 수준에서든, 선순환과 악순환 두 경로가 동시에 열려 있다. AI 기술 자체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시장이 어느 경로를 ‘선택’하느냐가 결정한다. 문제는 이 선택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윤이라는 거짓 안전등

이 연구의 수치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불편한 결과는 따로 있다. 두 균형 — 고학습과 저학습 — 에서 기업 이윤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핵심 발견 고학습 균형에서 기업은 숙련된 인력으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저학습 균형에서는 자동화로 인건비를 절감한다. 두 경로의 이윤 수준은 수치적으로 거의 구별이 안 된다. 반면 노동자의 기대생애효용은 고학습 균형에서 현저히 높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기업의 CFO가 분기 실적표를 펼쳤을 때, 자사가 고학습 균형에 있는지 저학습 균형에 있는지 판별할 방법이 없다. 매출은 비슷하고, 이익률도 비슷하다. 저학습 균형에서는 자동화가 만들어낸 비용 절감이 인적자본 손실을 고스란히 상쇄해버리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에서 가격과 이윤은 자원 배분의 핵심 신호다. 어떤 산업이 비효율적이면 이윤이 줄어들고, 그 신호를 보고 기업과 투자자가 행동을 바꾼다. 그런데 인적자본 함정에서는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기업이 주니어 업무를 AI로 대체하고, 신입 채용을 줄이고, 인적자본 파이프라인을 말리는 과정 전체가 이윤 지표에 포착되지 않는다. 경보등이 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경보등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건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런 상황이다. 건물의 구조물이 서서히 부식되고 있는데, 외벽 페인트가 멀쩡하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건물이 무너지는 날에야 부식 사실을 알게 된다. AI 시대의 인적자본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이익표가 외벽 페인트이고, 인적자본이 구조물이다.

숫자가 보여주는 이중 구조

12.4%

글로벌 청년 실업률 (2025)

ILO — Employment and Social Trends 2026

2.6억 명

교육·고용·훈련 미참여 청년(NEET) 규모

ILO — WESO 2026

21억 명

비공식 고용 근로자 — 학습 경로 자체가 부재

ILO — WESO 2026 전망

4.9%

글로벌 실업률 — ‘안정적’ 수치 뒤에 숨은 질적 정체

ILO — WESO 2026 전망

ILO의 2026년 보고서가 그리는 풍경이 이 논문의 이론과 정확히 맞물린다. 글로벌 실업률은 4.9%로 ‘안정적’이다. 그런데 그 안정적인 숫자 뒤에는 21억 명의 비공식 고용, 약 3억 명의 극빈층 근로자, 2억 6천만 명의 NEET 청년이 있다. ILO 사무총장 길베르 웅보의 표현을 빌리면, “탄력적 성장과 안정적 실업률 수치가 더 깊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ILO 보고서가 경고하는 AI와 청년 고용의 관계다. AI가 고소득 국가의 전문 직종을 찾는 고학력 청년에게 도전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대목 — 이것은 NBER 논문이 모델링한 ‘저학습 균형으로의 진입’과 동일한 현상을 경험적 데이터로 포착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좋은 일자리’의 입구였던 전문직 신입 포지션이 AI에 의해 줄어들면, 고학력 청년이 인적자본을 축적할 경로 자체가 차단된다.

실업률이 ‘안정적’이라는 숫자는, 논문이 말하는 ‘이윤이 거의 동일하다’는 발견과 같은 맥락이다. 거시 지표가 멀쩡해 보이기 때문에 구조적 붕괴를 감지하지 못한다.

이직률이 함정의 깊이를 결정한다

논문의 민감도 분석에서 한국 인사담당자가 주목해야 할 변수가 하나 있다. 노동자의 이직률(모델에서 χ로 표기)이 높을수록, 복수 균형이 존재하는 기술 가격 범위가 대폭 넓어진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자주 바뀌는 조직일수록 인적자본 함정에 빠지기 쉽다.

논리는 단순하다. 학습은 시간이 걸린다. 신입이 업무를 수행하면서 인적자본을 축적하고,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매니저로 전환된다. 이직률이 높으면 이 축적 과정이 중단되고, 숙련 매니저가 배출되지 않으며, 새로운 업무 영역을 개척할 인적자원이 고갈된다.

한국 맥락 한국의 전체 이직률은 OECD 평균 대비 높지 않지만, 청년층(15~29세) 이직률비정규직 회전율은 예외적으로 높다.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 임금근로자의 38%에 달하는 구조에서, 학습에 필요한 ‘충분한 체류 시간’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에 한정된다. 나머지 절반 이상의 노동시장에서는 AI 이전에 이미 학습 파이프라인이 부실했다는 뜻이다.

이 분석이 한국에 시사하는 바는 이중적이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내부 노동시장은 비교적 낮은 이직률 덕분에 고학습 균형을 유지할 조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이 지배하는 외부 노동시장은 높은 회전율로 인해 저학습 균형에 이미 근접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AI 도입이 가속되면, 이 이중 구조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대기업은 AI를 프론티어 확장에 활용하고, 중소기업은 단순 자동화에 머무른다. 같은 기술이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구조적 메커니즘이다.

AI세는 왜 틀린 답인가

인적자본 함정이 시장 신호로 감지되지 않는다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직관적인 정책 — AI/자동화에 일률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자 — 이 왜 잘못된 처방인지를 이 연구는 수학적으로 증명한다.

핵심은 AI 기술이 두 가지 용도로 동시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기존 업무의 자동화(대체 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업무 영역의 개척(프론티어 확장). 일률적 AI세는 두 용도를 구분하지 못한다. 자동화를 억제하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프론티어 확장 — 즉 AI의 긍정적 용도까지 억제한다.

연구진이 제시하는 최적 정책은 이중 도구(dual instrument)다. 자동화 이윤에는 과세하되, 프론티어 확장(신규 업무 창출) 지출에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수학적으로 도출된 최적 세율과 보조율은 동일한 크기다. 인적자본의 사회적 가치와 사적 가치 사이의 격차가 클수록 — 즉 인적자본 함정에 가까울수록 — 세율과 보조율 모두 높아져야 한다.

TAI = TF

최적 자동화세(TAI)와 프론티어 보조금(TF)은 크기가 동일해야 최적

NBER w35157 — Proposition 9

차선 대안

임금보조금 — 자동화 억제 + 프론티어 확장 동시 유도 가능, 다만 업무 수준에서 과잉 생산 왜곡 발생

NBER w35157 — Section 5.2

한국의 현재 AI 정책 프레임을 이 렌즈로 보면 불안한 구석이 보인다. ‘디지털 전환 촉진’이라는 기치 아래 AI 도입 보조금이 지급되고 있지만, 그 보조금이 자동화에 쓰이는지 프론티어 확장에 쓰이는지를 구분하는 메커니즘은 없다. 논문의 프레임에 따르면, 기술 도입 자체를 촉진하는 것은 고학습 균형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저학습 균형에서는 오히려 함정을 깊게 만든다.

파이프라인을 다시 설계하라

지금까지의 논의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AI가 신입의 업무를 대체하는 것은 비용 절감이 아니라 인적자본 파이프라인의 구조 변경이다. 그리고 이 구조 변경의 위험은 기업의 이윤 지표에 포착되지 않는다. 시장이 스스로 교정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한국 기업의 인사담당자에게 이것은 매우 구체적인 행동 과제를 남긴다. AI 도입 결정을 IT 부서나 경영진의 효율성 프로젝트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인적자본 파이프라인에 미치는 영향을 HR이 직접 평가하고 설계에 개입해야 한다. ‘이 업무를 자동화하면 신입이 무엇을 통해 학습하는가’라는 질문이 모든 AI 도입 의사결정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 연구가 제시하는 복수 균형 모델의 가장 냉정한 교훈은, 기업이 문제를 인지하는 시점에는 이미 저학습 균형에 고착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윤이 경보를 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어선은 사전 설계다 — 자동화와 학습의 균형을 이윤표가 아닌 인적자본 지표로 모니터링하는 체계를 지금 만드는 것.

💡 실무 시사점 — HR이 이번 분기에 점검할 3가지:

① AI 도입 시 학습 경로 영향 평가를 의무화하라. 자동화 대상 업무가 신입의 인적자본 축적 경로에 포함되는지 사전 점검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라. ‘이 업무를 없애면 신입이 3년 후 시니어가 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빠지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② 이직률과 학습 기간을 교차 분석하라. 부서별·직급별 평균 체류 기간이 핵심 스킬 습득에 필요한 최소 기간을 충족하는지 확인하라. 이직률이 높은 부서에서 AI 자동화를 우선 도입하면 인적자본 함정 위험이 가장 크다.

③ 이윤이 아닌 인적자본 지표를 경영 대시보드에 올려라. 신입 대비 시니어 비율, 직급별 평균 숙련도 도달 기간, 내부 승진율 등 인적자본 파이프라인 건강도를 분기별로 리포팅하라. 이윤표만으로는 함정을 볼 수 없다.

#AI자동화 #인적자본함정 #복수균형 #신입채용 #HR전략

참고 링크

작성: 서재홍 | N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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