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실무 문서 가이드

0 / 0 섹션 완료

매년 84만 명이 ‘일의 설계’에 죽는다 — 한국이 자축하는 안전 통계 뒤의 빈자리

올해 4월, ILO가 처음으로 집계한 숫자 하나가 노동안전 담론의 판을 뒤집었다. 직장 내 심리사회적 위험으로 매년 84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추락도, 폭발도, 화학물질도 아니다. 장시간 노동, 직무 불안정, 직장 내 괴롭힘 — 결국 ‘일이 설계된 방식’ 자체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 올해 1분기 사고사망이 5.2% 감소했다고 발표하며 안전한 일터에 한 발 더 다가섰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성적표에는 빠진 과목이 있다. 물리적 사고는 줄었지만,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2020년 40.7%에서 2025년 상반기 32.1%로 해마다 뒷걸음질 치고 있다. 사고가 줄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죽음을 세는 방법 자체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 줄 요약: 한국의 ‘안전한 일터’ 서사는 물리적 사고 감소 위에 서 있지만, ILO 84만 명 데이터를 대입하면 진짜 킬러는 추락이 아니라 일의 설계다 — 과로사 승인율 역주행은 위험의 감소가 아니라 제도적 비가시화를 뜻한다.

84만의 해부학 — 추락이 아닌 설계가 죽인다

ILO가 2026년 세계 산업안전보건의 날(4월 28일)을 맞아 발표한 글로벌 보고서는 직장 내 심리사회적 위험요인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직무 긴장(높은 요구+낮은 통제), 노력-보상 불균형, 고용 불안정, 장시간 노동, 직장 내 폭력·괴롭힘. 이 다섯 가지가 매년 84만 명의 사망과 4,500만 장애보정생존연수(DALY) 손실, 전 세계 GDP의 1.37%에 해당하는 경제적 비용을 만들어낸다.

840,000명/년

심리사회적 위험으로 인한 연간 사망자

ILO Global Report 2026

4,500만DALY

매년 손실되는 건강수명 연수

ILO Global Report 2026

1.37%

글로벌 GDP 대비 연간 경제 손실

ILO Global Report 2026

+35%

주 55시간 이상 근무 시 뇌졸중 위험 증가

WHO/ILO Joint Estimates

23%

전 세계 근로자 중 폭력·괴롭힘 경험 비율

ILO Global Report 2026

120억일/년

우울·불안으로 인한 연간 손실 근무일수

WHO 추정

숫자만 놓고 보면 심리사회적 위험은 이미 전통적 산업재해를 압도한다. 문제는 이 위험의 속성이다. 높은 곳에서 추락하면 바로 보이지만, 주 55시간 이상 노동이 뇌졸중 위험을 35% 끌어올리는 과정은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다. WHO/ILO 공동연구에 따르면 2016년 한 해에만 장시간 노동으로 74만 5,000명이 허혈성 심장질환과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이 수치는 2000년 대비 29% 증가했다. 솔직히, 사고사망 통계에만 매달리는 시선으로는 이 숫자가 잡히지 않는다.

한국의 안전 성적표에서 빠진 과목

한국 고용노동부는 2026년 1분기 산업재해 현황을 발표하면서, 전체 사망자 514명(전년 동기 대비 5.2% 감소)과 사고사망자 212명(3.2% 감소)을 강조했다. 숫자는 분명 좋아지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건설·제조 현장의 물리적 안전은 확실히 나아졌다.

그런데 같은 해, 같은 나라의 다른 통계를 펼쳐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2025년 업무상 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는 1,376명이었고, 이 가운데 뇌심혈관 질환 사망이 408명(29.7%)을 차지했다. 전년보다 105명, 8.3%가 늘었다. 사고사망은 줄었는데, 질병사망은 늘었다. 그런데도 뉴스 헤드라인에 오른 건 ‘사고사망 감소’였다.

1,833시간

한국 연간 근로시간 — OECD 평균보다 97시간 초과

OECD 2025

1,376명

2025년 업무상 질병 사망자 수 (전년 +8.3%)

고용노동부 2025

408명

뇌심혈관 질환 사망 — 질병사망의 29.7%

고용노동부 2025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1,833시간으로 OECD 6위다. 독일(1,332시간)보다 501시간, 일본보다 235시간을 더 일한다. ILO 보고서가 말하는 ‘장시간 노동’의 정의 — 주 48시간 초과, 전 세계 근로자의 35%가 해당 — 에 한국이 정확히 걸린다. ILO가 그리는 글로벌 그림에서 한국은 ‘위험 지대’ 한복판에 위치하는데, 정작 한국의 안전 서사는 물리적 사고 감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로사 승인율이 떨어지는 건, 과로가 줄어서가 아니다

여기서 가장 불편한 숫자가 등장한다. 뇌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과로사 유족급여 승인율이다.

데이터 — 과로사 승인율 추이 2020년 40.7% → 2021년 39.1% → 2022년 36.8% → 2023년 32.5% → 2024년 33.0% → 2025년 상반기 32.1%. 6년 연속 하락. 과로사 유족급여 청구 3건 중 1건만 문턱을 넘는다.

같은 기간 한국의 근로시간은 의미 있게 줄지 않았고, 업무상 질병 사망은 오히려 늘었다. 그렇다면 승인율 하락은 과로 자체가 줄어서가 아니라, 과로를 입증하는 문턱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826건), 건설업(493건), 운수·창고·통신업(398건) 순으로 청구가 집중되는데, 이들 업종은 대체로 장시간 노동이 관행인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가장 아이러니하다고 본다 — 과로가 가장 만연한 업종에서 과로사 인정이 가장 어렵다.

인정기준의 핵심은 ‘발병 전 12주간 주당 평균 근로시간’과 직전 근무강도 비교인데, 비교 기준이 ‘동종 유사 근로자’에서 ‘본인’으로 바뀐 것은 진전이지만, 만성적으로 과로하던 노동자의 경우 ‘평소’와 ‘발병 직전’의 차이가 크지 않아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한다. 늘 주 60시간을 일하던 사람이 주 62시간 일하다 쓰러지면, ‘특별한 업무 증가’로 인정받기 어렵다. 일상이 된 과로는 통계에서도, 법에서도 투명인간이 된다.

정신질환 산재 — 10배 늘었는데 문은 더 좁아졌다

물리적 과로사만이 아니다. ILO가 분류한 다섯 가지 심리사회적 위험 중 ‘직무 긴장’과 ‘직장 내 괴롭힘’은 정신질환과 직결된다. 한국에서 업무상 정신질환으로 산재를 신청한 건수는 2015년 46건에서 2024년 471건으로 10배 뛰었다. 적응장애만 따져도 2018년 51건에서 2024년 250건으로 5배가 됐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2019년 시행) 이후 ‘적법한 언어’를 얻은 노동자들이 피해를 신고하기 시작한 결과다.

그런데 승인율은 반대로 움직인다. 정신질환 산재 승인율은 2021년 70.5%에서 2024년 58.1%로 떨어졌다. 자살 산재는 더 극적이다 — 2021년 52.8%에서 2024년 31.5%로, 3건 중 2건이 불승인된다. 산재 신청 10명 중 6명이 탈락한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사례 — 지역별 승인율 격차 2023년 정신질환 산재 승인율은 서울이 79.9%로 가장 높았고, 부산·경남은 55.1%로 가장 낮았다. 같은 법, 같은 기준인데 지역에 따라 결과가 25%p 벌어진다. 법의 문제가 아니라 적용의 문제, 더 정확히는 심사 인프라와 전문성의 지역 편차가 만드는 구조적 불평등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소개한 일본의 과로사 유족 인터뷰 25건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유족이 ‘과로사’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는 건 공공기관이 아니라 동료나 가족을 통해서다. 사망 반년 전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산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고, 유품 메모에서 새벽 4시에 적은 자살충동 흔적이 발견되고 나서야 절차가 시작된다. 이건 좀 무섭다 — 제도가 존재하는데도 당사자와 유족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다면, 그 제도가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산안법의 사각지대 — 헬멧으로 스트레스를 막을 수 없다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물리적 위험에 대응하는 데 최적화된 법이다. 추락 방지, 화학물질 관리, 기계 안전 — 이런 영역에서는 세계적으로도 탄탄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심리사회적 위험이 이 프레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안법 제39조(보건조치)는 사업주의 건강장해 예방 의무를 규정하지만, 현행 조항에 정신건강은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과중한 업무상 부담과 심리적 부담에 의한 건강장해’를 제7호로 신설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아직 법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직무스트레스 예방 지침은 있으되, 구체적인 평가 방법·기준·범위가 규정되어 있지 않아 실효성이 의문이다.

2025년 한국 근로자 5,064명을 대상으로 한 심리사회적 안전 분위기(PSC) 전국 조사에서, 응답자의 50.71%가 고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절반이 넘는 노동자가 심리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위험을 관리할 법적 인프라는 여전히 ‘검토 중’이다.

구조적 문제 — 법의 시차 ILO는 심리사회적 위험을 물리·화학·생물학적 위험과 동등한 수준으로 다뤄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러나 한국 산안법은 물리적 위험에는 강제적 보건조치를 부과하면서, 심리사회적 위험에는 권고 수준의 가이드라인만 제공하는 이중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법이 위험을 차등 분류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위험은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된다.

글로벌 입법 흐름을 보면 한국의 지체가 더 선명해진다. 호주는 2022년부터 심리사회적 위험을 산업안전법에 명시하고 사업주에게 관리 의무를 부과했다. EU는 2023년 심리사회적 위험 관련 입법 프레임워크를 마련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포함해 대부분의 국가가 파편적인 노동법 조항에 의존하고 있어, 법적 인정과 실제 조직 관행 사이의 간극이 가장 크다.

일본이라는 거울 — 11년의 교훈

일본은 2014년 ‘과로사 등 방지 대책 추진법’을 제정했다. 아시아 최초로 과로사를 법률 용어로 정의한 나라다. 이 법은 과로사를 ‘업무상 과중한 부담에 의한 뇌혈관·심장질환으로 인한 사망’과 ‘업무상 강한 심리적 부하로 인한 정신장애를 원인으로 하는 자살’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런데 11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과로사는 줄지 않았고 승인율도 올라가지 않았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분석이 정곡을 찌른다 — 법이 있어도, 유족에게 정보가 도달하지 않고, 기업이 산재 신청을 방해하며, 인정된 기업명조차 비공개인 시스템에서는 법의 존재 자체가 무력화된다. 법을 만드는 것과 법이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한국이 지금 밟고 있는 길이 정확히 이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있지만, 그 피해를 산재로 인정받는 문턱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산안법 개정 논의는 있지만, 정신건강 조항은 아직 법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법의 존재와 법의 실효 사이, 그 간극에서 사라지는 숫자들이 있다.

일의 재설계라는 처방전 — 통계를 바꿔야 현실이 바뀐다

ILO 보고서의 핵심은 사실 84만이라는 숫자가 아니다. 이 보고서가 진짜 말하는 건 심리사회적 위험은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일의 설계 문제라는 프레임 전환이다. 업무량, 근무시간, 역할 명확성, 자율성, 지원 체계, 공정한 절차 — 이것들은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 통제하는 변수다.

한국의 맥락에서 이 전환은 두 가지 차원의 변화를 요구한다. 첫째, 안전의 정의를 넓혀야 한다. 사고사망 감소만으로 ‘안전한 일터’를 선언하는 관행을 바꾸고, 심리사회적 위험을 공식 안전 지표에 포함시켜야 한다. 둘째, 과로사·정신질환 산재 심사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만성 과로를 ‘평소’로 정상화하는 비교 기준, 지역별로 25%p 벌어지는 승인율 격차, 유족에게 정보가 도달하지 않는 사각지대 — 이런 것들은 법 조항 하나로 해결되지 않는다. 심사 인프라와 전문성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84만 명이라는 숫자는 글로벌 집계다. 한국에 정확히 몇 명이 해당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핵심이다 — 세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한국의 산업안전 시스템은 물리적 사고를 세는 데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일의 설계가 만드는 느린 죽음은 아직 세는 법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ILO가 던진 84만이라는 숫자 앞에서, 한국의 안전 서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 실무 시사점 — HR이 점검해야 할 3가지:

① 장시간 노동 모니터링을 ‘안전 지표’로 격상시킬 것. 근태 관리와 산업안전을 별도 부서에서 따로 보는 관행을 바꿔야 한다. 주 52시간 준수는 최소선이지, 안전선이 아니다. ILO 기준으로 주 48시간 초과 근로자를 선별하고, 뇌심혈관 건강검진과 연결하는 통합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② 심리사회적 위험 평가를 연 1회 의무화할 것. PSC 설문에서 한국 노동자의 50.71%가 고위험군이었다. 이 데이터를 HR 대시보드에 올리고, 직무 재설계의 근거로 활용해야 한다. 산안법 개정을 기다릴 필요 없이, 자체 보건관리 프로세스에 포함시킬 수 있다.

③ 과로사·정신질환 산재 대응 가이드를 사내 공유할 것. 일본 사례가 보여주듯, 제도가 있어도 당사자에게 정보가 도달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뇌심혈관 발병 시 산재 신청 절차, 정신질환 산재 기준, 유족급여 청구 방법을 인트라넷에 게시하는 것만으로도 정보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다.

#심리사회적위험 #과로사 #산업안전보건법 #ILO #HR실무

참고 링크

작성: 서재홍 | NODE

ON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