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2일, 제네바 ILO 총회장에서 406대 8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하나의 협약이 통과됐다. 제193호 ‘플랫폼 경제 양질의 노동 협약’—전 세계 1.5억 플랫폼 노동자를 위한 최초의 국제 조약이다. 배달 라이더부터 데이터 라벨러까지, 고용 분류와 무관하게 기본권을 보장하겠다는 선언. 그런데 이 협약을 한 조항씩 뜯어보면 이상한 지점이 드러난다. ‘고용 분류와 무관한 보편적 권리’를 선언한 바로 그 문서가, 최저임금과 사회보장이라는 가장 실질적인 권리만큼은 고용 분류에 종속시켜 놓았다—선언의 보편성과 실체의 조건부성 사이에 구조적 균열이 내장된 협약이다.
한 줄 요약: 플랫폼 노동 최초의 국제 조약은 ‘보편적 권리’를 약속했지만, 정작 최저임금·사회보장은 고용 분류에 묶어놓아 선언과 실체 사이에 구조적 균열을 남겼다.
406대 8이라는 숫자가 감추는 것
찬성 406, 반대 8, 기권 36. 숫자만 보면 국제사회의 만장일치에 가깝다. 그런데 반대 8표 안에 미국이 있다. Uber, Lyft, DoorDash의 본국이다. 기권 36표에는 플랫폼 노동자가 770만 명에서 2,350만 명으로 급증하고 있는 인도와, 영국이 포함돼 있다.
406표
찬성 — 역대 ILO 협약 중 최고 수준 지지율
ILO 제114차 국제노동회의 (2026.6.12)
8표
반대 — 미국·뉴질랜드·한국 경총 포함
ILO 표결 기록
1.5억 명
전 세계 플랫폼 노동자 적용 대상 추산
ILO 추정치 (2026)
36표
기권 — 인도·영국 등 플랫폼 대국 포함
ILO 표결 기록
한국은? 정부와 노동자 대표가 찬성, 경영자 대표인 경총이 반대표를 던졌다. 표결 결과의 진짜 의미는 찬반 비율이 아니라 기권의 구성에 있다. 플랫폼 경제 규모가 큰 국가들이 기권이나 반대로 돌아섰다는 건, 이 협약이 비준·이행 과정에서 상당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는 신호다.
‘분류와 무관하게’—가장 혁신적인 문장의 사정거리
이 협약의 심장은 Article 3이다. 고용 상태 분류와 무관하게 모든 플랫폼 노동자에게 기본권을 보장한다.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권, 강제노동·아동노동·차별로부터의 보호. 자영업자에게도 단체교섭권을 부여하면서 경쟁법 예외 적용의 근거까지 만들었다. 이 한 조항만 놓고 보면, 플랫폼 노동 규범의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 ‘보편성’의 사정거리다. Article 3의 기본권 목록에 최저임금은 없다. 사회보장도 없다. 이 두 가지—노동자의 일상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권리—는 Article 10-11(보수)과 Article 12(사회보장)로 넘어가는 순간 고용 분류에 종속된다. 고용관계가 인정된 노동자에게만 최저임금이 적용되고, 자영업으로 분류되면 비구속적 ‘권고’ 수준에 머문다.
개인적으로는 이 구조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406대 8이라는 표차를 만들기 위해 치른 타협의 흔적이다. 보편적 기본권 선언으로 전면을 장식하되, 실질적 비용이 발생하는 항목은 각국 재량으로 돌려놓은 설계—의도된 모호함이다.
알고리즘에 인간을 끼워넣겠다는 약속
Articles 13-16이 이 협약에서 가장 날카로운 조항군이다. Article 13은 플랫폼이 사용하는 자동화 시스템의 존재·목적·설계 방식을 노동자에게 사전 고지하도록 했다. Article 14는 알고리즘이 노조 활동 탐지나 차별적 결과 생성에 사용되어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핵심은 Article 15다. 임금 보류, 계정 정지, 계약 종료 같은 결정에 반드시 인간의 실질적 검토를 거치도록 요구한다. ‘고무도장(rubber-stamp)’이 아닌 진짜 검토를 명시한 건 국제 노동 규범 역사상 처음이다.
사례 — 배달 플랫폼 계정 정지 국내 한 배달 플랫폼에서 고객 불만 3건이 접수되자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라이더 계정을 정지시켰다. 라이더가 이의를 제기하기까지 11일이 걸렸고, 그 사이 소득은 제로였다. Article 15가 국내법으로 이행되면, 이런 자동 정지에 인간 검토가 의무화된다. 다만 ‘형식적 검토’와 ‘실질적 검토’의 경계를 누가 감시할 것인지는 열린 문제다.
솔직히 이 조항의 실효성은 ‘실질적 검토’의 정의에 달려 있다. 플랫폼이 형식적으로 인간 검토자를 배치해놓고 알고리즘 결정을 그대로 승인하는 구조를 만든다면—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비용 측면에서 합리적이라면—Article 15는 종이 위의 약속으로 남을 수 있다. 이 조항이 진짜 힘을 갖기 위해서는, 검토의 ‘실질성’을 판단할 수 있는 근로감독 역량이 전제돼야 한다.
최저임금은 ‘기본권’이 아닌가
이 협약이 내장한 구조적 균열의 핵심이다. Article 3은 ‘고용 분류와 무관한’ 기본권을 선언한다. 그런데 그 기본권 목록에 최저임금이 빠져 있다. 사회보장도 빠져 있다. 결사의 자유와 차별 금지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내일의 배달 건수와 산재 보상 여부에 직면한 노동자에게, 가장 시급한 보호가 기본권 목록에서 누락됐다.
적용
고용관계 인정 시 — 최저임금·산재보험·실업급여 보호
협약 Article 10-12 기준
권고
자영업 분류 시 — 비구속적 권고만, 법적 강제력 없음
협약 Recommendation 수준
동일
두 경우 모두 — 결사의 자유·차별 금지·안전보건 적용
협약 Article 3 기준
협약의 논리를 따라가면 이런 상황이 된다. 배달 라이더 A는 고용관계가 인정돼 최저임금과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는다. 동일한 플랫폼에서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 라이더 B는 자영업으로 분류돼 비구속적 권고만 적용된다. 두 사람 모두 ‘고용 분류와 무관한 기본권’을 누리지만, 정작 월급과 산재 보상에서는 분류가 모든 걸 결정한다. Asian Labour Review는 이 구조를 “수백만 크라우드워커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후퇴”라고 평가했다.
Article 9의 고용 분류 판정 기준도 미묘하다. ‘주로 업무 수행의 사실관계를 기준으로(guided mainly by the facts)’ 판단하도록 했는데, ‘주로(mainly)’라는 단어가 ‘기타 요소(other elements)’의 고려 여지를 남겨둔다. 영국 대법원 Aslam 판결처럼 요금·경로·배차에 대한 실질적 통제를 엄격히 심사하는 방향으로 갈지, 아니면 ‘기타 요소’를 활용해 분류 회피의 여지를 남길지는 각국 이행에 달려 있다.
찬성표를 던지고 돌아와 부결시킨 나라
한국 정부는 제네바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같은 시기 국내 최저임금위원회는 플랫폼 노동자 최저임금 적용 방안을 부결시켰다. 이 이중 태도는 협약 자체의 이중 구조를 거울처럼 반영한다. 국제 무대에서는 ‘보편적 권리’를 지지하면서, 실질적 비용이 수반되는 국내 이행에서는 후퇴하는 패턴이다.
쟁점 — 한국의 이행 경로 한국 노동법 체계에서 플랫폼 노동자의 위치는 이중으로 불안정하다. 근로기준법 제2조의 근로자 정의가 경제적 종속성을 반영하지 않아,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상당수가 법 적용에서 제외된다. 이행 경로도 논쟁적이다. 근로기준법 제2조 개정론(정혜경 의원)은 플랫폼 노동자를 근로자 범위에 직접 포함하자는 입장이고, ‘일하는 사람 기본법’ 제정론(정부)은 별도 입법을 선호한다. 후자는 실질적 권리가 속빈 형식 보호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를 동반한다.
산재보험은 일부 특수고용직에 확대 적용 중이지만, 전면 적용에는 아직 거리가 있다.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아 배달·플랫폼 노동자의 단체교섭도 제한적이다. 협약이 보장하겠다는 ‘분류 불문 단체교섭권’이 한국에서 실현되려면, 노동조합법의 근로자 정의부터 손대야 한다. 국제 무대의 찬성표 하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비준 없이도 작동하는 규범의 힘
미국이 비준하지 않아도, Uber·Lyft·DoorDash 같은 미국 기반 플랫폼은 비준국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한 해당국의 이행 법령 적용 대상이 된다. 협약의 실제 영향력은 비준 자체보다 이 간접 경로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 EU는 이미 2024년 플랫폼 노동 지침을 채택했고, 193호와의 정합성 작업이 진행 중이다. 스페인의 고용 추정제(‘라이더스 법’)는 협약 Article 9의 ‘사실 우선 원칙’과 궤를 같이한다.
이건 좀 아쉽다—협약 채택 시 상세 이행 지침을 제공하는 ‘권고(Recommendation)’를 동시에 채택하지 못하고 2-3년 후로 연기했다. 이행 프레임워크가 모호해진 가장 큰 원인이다. 집단적 대표 기구를 통한 알고리즘 검토 조항도 최종안에서 삭제됐고, 중간업자(하청 체인) 책임 소재와 계약 일방 변경 금지 규정도 빠졌다. 협약의 뼈대는 세워졌지만, 살을 붙이는 작업은 각국의 몫으로 남았다.
반쪽짜리 약속이 만든 새로운 좌표
ILO 193호는 완벽한 협약이 아니다. 보편적 권리를 선언하면서 가장 실질적인 권리를 조건부로 만들었고, 이행 프레임워크도 미완성이다. 한국 정부의 이중 태도—국제 무대 찬성, 국내 부결—는 이 협약 자체의 구조적 모순을 축소 재현한다. 선언은 보편적이고, 실체는 조건부다.
그럼에도 이 협약이 만든 규범적 좌표는 되돌리기 어렵다. 플랫폼 노동자도 ‘노동자’라는 국제적 합의가 문서로 존재하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향후 국내법 논쟁에서 기준점이 된다. 알고리즘 관리의 투명성과 인간 검토 의무가 국제 규범으로 문서화된 것도 처음이다. 반쪽짜리 약속이라도 약속은 약속이고, 문서화된 약속은 이행을 요구할 근거가 된다.
💡 실무 시사점 — HR이 이번 분기에 점검할 3가지:
① 플랫폼 인력 활용 현황 재점검. 자사가 배달·물류·IT 외주에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다면, 협약 비준 시 고용 분류 재판정 대상이 될 수 있다. 계약서 문구가 아닌 실제 업무 수행 방식 기준으로 사전 검토가 필요하다.
② 알고리즘 의사결정 투명성 확보. AI 기반 인사·평가·배정 시스템을 운영 중이라면, 자동화된 불이익 결정(징계·해고·배정 제외)에 인간 검토 절차가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Article 15 기준이 국내법에 반영될 경우 대비가 필요하다.
③ 이행 입법 동향 모니터링. 근로기준법 제2조 개정론과 ‘일하는 사람 기본법’ 제정론이 병행 논의 중이다. 어느 쪽이 채택되느냐에 따라 플랫폼 인력의 근로자성 판단 기준이 달라지므로, 입법 동향을 분기별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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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링크
- ILO, “International Labour Conference ends with adoption of first Convention on decent work in the platform economy” (2026)
- Asian Labour Review, “ILO Convention on Platform Labour: Analysis and Verdict” (2026)
- Wolters Kluwer, “ILO Convention 193: At Long Last, a Global Rights Floor” (2026)
- 아시아투데이, “ILO 플랫폼 노동 협약, 한국의 이행 과제” (2026)
- 산업종합저널, “양대 노총, ILO 플랫폼 협약 채택 환영” (2026)
- Privacy International, “ILO Convention on Decent Work in the Platform Economy” (2026)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