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춘 500 기업 중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실천 사항을 공개 보고하는 기업이 1년 만에 65% 줄었다. 미국 인권캠페인재단(HRC)의 기업평등지수에 참여한 기업 수는 2025년 377개에서 2026년 131개로 쪼그라들었다. 숫자만 보면 DEI가 끝난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참여 기업 안에서 포용 정책 채택률은 모든 측정 기준에서 전년 대비 오히려 상승했다. 공개를 멈췄지, 실천을 멈춘 게 아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다. 정치 압력에 밀려 다 포기했을 줄 알았는데, 현장은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줄 요약: DEI 공시는 급감했지만, 포용 정책 채택은 오히려 증가 — 기업들은 ‘보이는 DEI’에서 ‘실질적 포용’으로 전환 중이다.
공시는 줄었는데 정책은 늘어난 구조적 이유
2025년부터 미국에서 벌어진 DEI 반발은 거셌다.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명령, EEOC의 가이던스 철회, 스타벅스를 상대로 한 플로리다 주 법무장관의 ‘인종 기반 채용 쿼터’ 소송. 기업 입장에서 DEI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건 소송 리스크가 됐다.
그러나 실제로 DEI 프로그램을 폐지한 기업은 5%에 불과하다. 8%가 예산을 줄였고, 나머지는 이름을 바꾸거나 보고 방식을 조정했을 뿐이다. HRC 재단의 표현을 빌리면, “포용 정책의 철수가 아니라 외부 문서화 방식의 재평가”다.
개인적으로는 여기가 핵심이다. 공시를 멈춘 건 전략적 판단이지, 가치의 포기가 아니라는 것. 이 구분을 못 하면 현상을 완전히 반대로 읽게 된다.
65%
포춘 500 DEI 공시 감소율 (전년 대비)
HRC 기업평등지수, 2026
5%
DEI 프로그램을 실제 폐지한 기업 비율
HR Dive, 2026
8배
포용 정책 유지 기업의 순이익 격차
HRC Foundation, 2026
DEI를 숨기면 직원에게 무슨 일이 생기나
숫자가 냉정하다. DEI를 축소한 조직에서 차별이나 편견을 경험했다고 답한 직원 비율은 54.2%다. DEI를 유지한 조직에서는 24.9%.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더 심각한 건 이직 의향이다. 직장 환경을 ‘적대적’이라고 느끼는 직원의 86%가 퇴사를 고려하고 있었다. LGBTQ+ 직원 중 고위험군의 47.9%는 생산성 저하를 보고했다. 포용 정책을 줄이면 비용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인재 이탈 비용이 늘어나는 구조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76%의 구직자가 다양한 인력 구성을 취업 결정의 핵심 요소로 꼽는다. MZ세대 채용 경쟁에서 포용 문화는 연봉만큼이나 셀링 포인트가 되고 있다.
이사회 다양성의 숨겨진 병목 — 명성의 역설
런던증권거래소 FTSE 100 기업 이사 약 2,000명을 분석한 연구가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다. 여성 이사는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추가 이사직 임명 가능성이 높다. 여기까지만 보면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기업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이 패턴이 뒤집힌다. 가장 유명한 기업에서는 남성의 추가 임명 가능성이 올라가는 반면, 여성은 오히려 낮아진다. 자격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들 고명성 기업의 여성 이사는 남성 동료보다 더 많은 이사직 경험, 더 우수한 학력, 더 풍부한 경력을 갖추고 있었다.
원인은 구조적이다. 고명성 기업에서 여성 이사는 투자자, 규제기관, 언론의 과도한 주목을 받고, 멘토링이나 다양성 이니셔티브 같은 비공식 업무가 불균형하게 쏠린다. 이건 좀 아쉽다. 대표성 지표만 채우면 됐다고 생각하는 조직이 많은데, 실제로는 임명 이후의 경력 이동성까지 봐야 한다.
사례 — FTSE 100 이사회FTSE 100 기업 이사 2,000명 분석 결과, 고명성 기업에서 여성 이사의 추가 임명 가능성이 오히려 감소했다. 더 높은 자격을 갖춘 여성이 더 적은 기회를 얻는 ‘명성의 역설’이 작동하고 있었다. 단순한 수치 목표를 넘어, 이사 선임 파이프라인 전체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증거다.
한국 기업에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것
한국에서 DEI는 아직 ESG 보고서의 한 칸을 채우는 수준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글로벌 데이터를 보면, DEI를 공개적으로 축소한 기업과 유지한 기업 사이에 순이익 격차가 8배다. 이건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 성과의 문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이 있다. 미국에서 DEI 프로그램을 줄인 조직의 직원 차별 경험이 두 배 이상 올랐다는 것은,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안전장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프로그램을 없앤다고 “역차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차별 억제 기능이 해제된다.
한국 기업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명확하다. 공시 의무나 정치적 압력과 무관하게, 내부 인재 데이터를 점검하는 것이다. 승진율, 이직률, 성과평가 분포를 성별·연령·직군별로 교차 분석했을 때 편차가 보이는 지점이 곧 HR의 개입 지점이다.
보이지 않는 포용이 살아남는 방식
DEI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적 리스크를 관리하는 기업들의 공통점이 있다.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사업 성과에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광고에 쓸 다양성이 아니라, 채용 파이프라인의 편향을 줄이고 이직률을 낮추는 도구로 설계한 조직은 외부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브랜딩이나 컴플라이언스 목적으로 시작한 DEI는 바람이 바뀌면 가장 먼저 잘린다. 이건 DEI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업 성과와 연결되지 않은 HR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든 경기 침체기에 첫 번째 삭감 대상이 된다.
답은 아직 없다. DEI라는 이름이 살아남을지, 다른 이름으로 진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방향은 보인다. 투명한 포용 정책을 유지한 기업이 8배 높은 순이익을 기록한다는 데이터는, 이 논쟁의 결론이 이미 숫자 안에 있다는 걸 말해준다.
💡 실무 시사점: DEI 공시 축소는 포기가 아닌 전략적 전환이다. 한국 기업은 정치적 프레임과 무관하게 내부 인재 데이터의 교차 분석(승진율·이직률·평가 분포)부터 시작하고, 포용 프로그램을 사업 성과 지표에 연결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다양성#DEI#HR트렌드#인재관리#조직문화
참고 링크
- HBR, “Research: For Women on Boards, Prestige Can Be a Bottleneck” (2026)
- Mercer, “DEI: Fuelling Your Competitive Advantage” (2026)
- Human Resources Director, “DEI goes dark: Employers retreat from transparency, not inclusion” (2026)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