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근로자 5명 중 1명, 퇴직급여 밖에 서 있다
퇴직급여는 한국 노후소득보장의 한 축이다. 국민연금과 함께 은퇴 후 삶을 떠받치는 이중 바닥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바닥에 구멍이 나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26년 5월 노동리뷰에서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임금근로자 2,214만 3,000명 가운데 471만 4,000명이 퇴직급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비율로 따지면 21.3%. 다섯 명 중 한 명은 일을 하고도 퇴직급여를 받을 수 없는 구조 안에 있다.
2015년에는 이 비율이 26.6%였다.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솔직히, 10년 동안 5%포인트 줄인 걸 ‘개선’이라 부르기엔 속도가 너무 느리다. 그 사이 고용 구조는 훨씬 빠르게 바뀌었고, 사각지대의 성격 자체가 달라졌다.
한 줄 요약: 퇴직급여 사각지대 471만 명은 제도의 빈틈이 아니라 고용 구조 변화가 만든 설계 결함이며, ‘1년·15시간’ 적용 경계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
사각지대의 지형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사업주가 퇴직급여를 아예 운영하지 않아서 생기는 ‘실질적 사각지대’가 문제의 중심이었다. 사장이 안 줘서 못 받는 구조. 그런데 지금은 양상이 다르다. 애초에 법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퇴직급여 대상에서 제외되는 ‘제도적 사각지대’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일은 하는데, 법이 정한 선을 넘지 못해서 보호망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 선이 바로 ‘계속근로기간 1년’과 ‘주 소정근로시간 15시간’이다. 이 두 기준은 퇴직급여 적용 여부를 가르는 결정적 경계선인데, 문제는 이 경계선이 설계된 시점과 지금의 고용 현실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있다는 점이다.
471만명
퇴직급여 사각지대 규모 (임금근로자의 21.3%)
KLI 노동리뷰, 2026.5
37.1%
60세 이상 고령층 사각지대 비율 (연령대별 최고)
KLI 노동리뷰, 2026.5
23.9%
15~29세 청년층 사각지대 비율
KLI 노동리뷰, 2026.5
3.8십억 명
전 세계 사회보호 사각지대 인구
ILO WSPR, 2024-26
고령층 37%, 청년층 24% — 양극단이 무너진다
사각지대에 가장 깊이 빠져 있는 건 60세 이상 고령층이다. 37.1%가 퇴직급여 보호 밖에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고령층 일자리의 상당수가 단시간·단기 계약이다. 4시간짜리 청소, 주 3일짜리 경비, 6개월짜리 공공근로. 이런 일자리는 구조적으로 ‘1년 이상 근속’이나 ‘주 15시간 이상’이라는 요건을 채울 수 없다.
반대편 끝에는 15~29세 청년층이 있다. 23.9%가 사각지대다. 첫 일자리 진입 과정에서 인턴, 수습, 계약직을 거치며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여성 근로자는 사각지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보건·사회복지서비스업, 숙박·음식점업, 도매·소매업처럼 영세사업장이 밀집하고 노동 이동이 잦은 업종에서 사각지대 비중이 유독 높다.
개인적으로는, 이 숫자들이 그려내는 그림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일을 오래 해온 세대와 막 일을 시작하는 세대가 동시에 보호망 밖에 있다. 퇴직급여라는 제도가 정작 ‘퇴직’에 가장 가까운 사람과 ‘입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는 셈이다.
ILO가 보는 풍경 —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한국만의 결함이 아니다. ILO가 2024년 발간한 World Social Protection Report 2024-26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52.4%만이 최소 하나 이상의 현금 사회보호 급여를 받고 있다. 2015년 42.8%에서 올랐지만, 여전히 38억 명이 아무런 사회보호 없이 살아간다.
기후위기에 가장 취약한 상위 20개국에서는 91.3%가 사회보호를 받지 못한다. 성별 격차도 뚜렷하다. 여성 보호율 50.1%, 남성 54.6%. 한국의 퇴직급여 사각지대에서 여성 비율이 절반을 넘는 현상은 글로벌 패턴과 정확히 겹친다.
사례 — 호주 도제 임금보조금 프로그램호주는 코로나19 시기 도제(apprentice) 임금의 50%를 정부가 보조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단기·저임금 근로자가 고용 보호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2026년 발표된 평가 연구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은 도제 이탈률을 유의미하게 낮췄으며, 고용 안정성과 사회보호 연속성을 동시에 확보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ILO는 저·중소득국가가 최소한의 사회보호 바닥(social protection floor)을 확보하려면 GDP 대비 3.3%, 금액으로는 1.4조 달러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추산한다. 한국처럼 제도 자체는 존재하되 적용 기준이 현실과 괴리된 경우, 문제의 본질은 재정이 아니라 설계에 있다.
기금형 전환이 답이 될 수 없는 이유
정부는 퇴직연금 시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5년 퇴직연금 적립금이 501.4조 원을 돌파했고, 2026년부터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30인 이하 중소기업에서 300인 규모까지 확대하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모든 사업장 퇴직연금 의무화도 추진한다.
하지만 이건 이미 제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운용 수익률과 수급 안정성을 높이는 조치다. 애초에 ‘1년·15시간’ 기준에 걸려 제도 밖에 있는 471만 명에게는 기금형이든 확정급여형이든 의미가 없다. 울타리를 더 튼튼하게 만드는 것과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이 점을 직시하며 “퇴직급여 적용 경계를 재설계하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도 2026년 6월까지 1년 미만 근로 현황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7월부터 경사노위를 통해 대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특수고용·플랫폼 종사자에 대해서는 퇴직급여 공제회 등 별도 경로도 탐색 중이다.
현행 적용 제외 기준과 재설계 논점
| 현행 기준 | 사각지대 효과 | 재설계 방향 |
|---|---|---|
| 계속근로 1년 미만 제외 | 단기계약 반복 근로자 전원 탈락 | 비례적 퇴직급여(근속일수 비례 지급) |
| 주 15시간 미만 제외 | 초단시간 고령·청년 근로자 배제 | 시간 기준 하향 또는 폐지 검토 |
| 특고·플랫폼 적용 불가 | 새로운 취업 형태 전체 미포괄 | 공제회·별도 퇴직적립 경로 신설 |
퇴직급여는 누구의 권리인가
퇴직급여 사각지대 논의에서 빠지기 쉬운 한 가지가 있다. 이 제도가 ‘노후소득보장 수단’으로 설계됐지만, 현실에서는 상당수가 일시금으로 수령해 당장의 생활비로 쓴다는 점이다. 소규모 기업일수록 퇴직금제도(퇴직연금이 아닌)를 유지하고, 근로자도 연금보다 일시금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건 제도 설계의 의도와 현장의 필요가 어긋나고 있다는 신호다.
471만 명의 사각지대는 숫자가 아니라 질문이다. 11개월을 일하고 나온 사람은 왜 퇴직급여를 받을 수 없는가. 주 14시간을 일하는 사람의 노동은 왜 ‘보호할 가치가 없는 노동’으로 분류되는가. 기금형 전환이나 적립금 500조 돌파 같은 수치가 의미를 가지려면,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 실무 시사점: 퇴직급여 적용 여부는 단순한 법적 요건 체크가 아니라, 조직 내 보호 격차의 지표다. 단기계약 반복 구조가 고착된 사업장이라면, 1년 미만 근속자 비율과 퇴직급여 적용률을 함께 모니터링하고, 향후 제도 변경에 대비한 비용 시뮬레이션을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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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링크
- 아주경제, “임금근로자 5명 중 1명은 ‘퇴직급여 사각지대’…여성·청년·고령층 집중” (2026)
- KLI, “퇴직급여 실질적 사각지대 발생 유형과 비중” (2026)
- ILO, “World Social Protection Report 2024-26” (2024)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년 만에 ‘퇴직연금 제도’ 대대적 개편…모든 사업장 의무화 추진” (2026)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