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한 중견 제조업체 인사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정년이 65세로 늘어나면 우리 회사는 버틸 수 없다.” 과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숫자를 뜯어보니 과장이 아니었다. 이 회사의 평균 근속 연수는 18년, 임금체계는 호봉제. 55세 직원의 연봉이 30세 직원의 2.4배다. 정년이 5년 늘어나면 인건비 총액이 연간 12억 원 이상 증가한다. 직원 수를 줄이지 않는 한.
정년연장 논의는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다. 국회에 법안이 올라가 있고, 2028~2029년 시행이 유력하다. 그런데 정작 기업 현장은 어떤가. 고령 인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임금을 줄 것이며, 어떤 역할을 맡길지 — 이 세 가지 질문에 답을 가진 HR 조직이 거의 없다.
한 줄 요약: 정년 65세 시대, 호봉제를 직무급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정년연장은 조직의 인건비 부담이 아니라 경쟁력 붕괴의 트리거가 된다.
77%가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서 못 바꾸는 구조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77%가 연공급 임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답했다. 놀라운 숫자가 아니다. 진짜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실제로 직무급이나 역할급으로 전환한 기업은 전체의 15%도 안 된다. 인식과 실행 사이에 60%포인트 이상의 틈이 벌어져 있다.
솔직히, 이건 좀 답답한 현실이다. 왜 못 바꾸는가? 세 가지 벽이 있다.
하나는 노사 합의의 벽이다. 호봉제 개편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아 근로자 과반수 동의가 필요하다. 20년 넘게 호봉제로 근무한 직원에게 “내년부터 직무급입니다”라고 말하기란, 현실적으로 전쟁 선포와 다름없다.
다른 하나는 직무분석 역량의 벽이다. 직무급 전환의 전제는 모든 포지션의 직무 가치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 중 체계적 직무분석을 완료한 곳은 대기업 기준으로도 30%를 넘기기 어렵다.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은 경영진의 우선순위 문제다. 단기 실적 압박 앞에서 임금체계 개편 같은 2~3년짜리 프로젝트는 늘 뒷전이다. 그러다 법이 시행되면 그때 가서 허둥대는 것이 반복된다.
77%
연공급 개편 필요 인식 기업
한국경영자총협회, 2025
41.4%
정년연장 시 인건비 부담 우려
경총 정년연장 설문, 2025
67.8%
퇴직자 촉탁 재고용 시행 기업
경총, 2025
호봉제 아래서 정년연장은 세대 간 충돌을 부른다
정년연장의 가장 큰 반대 논거는 ‘청년 일자리 잠식’이다. 이 논거가 힘을 갖는 이유는 호봉제 때문이다. 고정된 인건비 총액 안에서 고연차 직원이 더 오래 머물면, 신규 채용 여력은 줄어든다. 수학적으로 당연하다.
2026년 5월 기준 취업자 수는 2,912만 명. 전년 대비 증가분의 대부분이 60세 이상 고령층에서 나왔다. 반면 청년 고용률은 43.8%로 하락세다. 세대 간 고용 불균형이 이미 수치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여기가 핵심이다. 정년연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연공급 구조 위에 정년연장을 올리는 것이 문제다. 직무급 체계에서는 정년이 늘어나더라도 해당 직무의 시장 가치에 맞는 보상이 이뤄지기 때문에 인건비 총액 증가가 제어된다. 일본이 2013년 65세 정년을 도입하면서 역할급 전환을 병행한 것은 바로 이 논리다.
55~64세 고용률은 역대 최고인 59.5%를 기록했고, 고령층의 69.4%는 73.4세까지 일하기를 원한다. 이 숫자가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고령 인력은 이미 노동시장의 주류다. 문제는 이들을 담을 그릇 — 임금체계와 직무 설계 — 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례 — 현대자동차 촉탁 재고용현대자동차는 정년 퇴직 후 촉탁직으로 재고용하면서 신입사원 수준의 임금을 적용했다. 수십 년의 숙련을 가진 기술자에게 초급 수준의 보상을 제공한 셈이다. 이 방식은 비용은 절감하지만 숙련 인력의 동기를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기술 전수의 질을 낮춘다. 연공급도 문제지만, 연공급의 반대극단 역시 답이 아니다. 직무 가치에 기반한 중간 지점을 설계하는 것이 HR의 과제다.
KDI가 말하는 ‘끝까지 매칭’의 진짜 의미
KDI 김민호 규제연구실장이 2026년 4월에 발표한 칼럼의 제목은 도발적이다. “될 때까지 매칭.” 기존 고용정책이 ‘정보 제공’에 그쳤다면, 이제는 실제 취업 완료까지 추적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한다. 1985~1994년생의 첫 직장 구직 기간은 평균 12.05개월로, 1975~1984년생의 10.7개월보다 늘어났다. 구직 중 ‘시간 낭비’를 경험하는 비율도 2008년 15%에서 2025년 25%로 급증했다. 50세 이상 이탈 인력은 기존 전문성과 무관한 단순 노무직이나 자영업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건 정년연장 논의와 직결된다. 60세에 퇴직한 숙련 인력이 치킨집을 차리는 사회와, 그 숙련을 조직 안에서 주니어에게 전수하는 사회. 어느 쪽이 사회적 자본의 손실이 적은지는 자명하다. 다만 후자가 작동하려면 ‘무슨 직무를, 어떤 보상으로, 몇 년간’ 수행할지가 명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호봉제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직무급 전환, 실무에서 어디부터 시작할 것인가
직무급 전환을 ‘빅뱅’으로 하려는 기업이 실패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 번에 모든 직무의 가치를 매기고, 모든 직원의 임금을 재조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접근은 단계적 전환이다.
고용노동부의 임금체계 개편 가이드북이 제시하는 로드맵은 세 단계로 나뉜다. 먼저 직무분석과 직무평가를 완료한다. 이 단계에서 각 포지션의 상대적 가치를 결정한다. 다음으로 직무등급을 설계하고 등급별 임금 밴드를 설정한다. 마지막으로 기존 호봉 임금을 새 밴드에 매핑하되, 기존 임금이 새 밴드 상한을 초과하는 경우 동결(레드서클)로 처리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레드서클’ 관리다. 호봉이 높아 직무급 밴드 상한을 초과하는 직원 — 대개 고연차 — 의 임금을 동결하거나 감액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리스크가 크다. 임금피크제와 결합해 정년 이전 3~5년 구간에서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아쉽다. 이런 접근이 가능하려면 최소 2~3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한데, 법 시행까지 남은 시간은 이미 짧다. 2026년 하반기부터 직무분석에 착수해야 2028~2029년 시행에 겨우 맞출 수 있다.
미국 HR이 퇴직연금 불안에 대응하는 법, 한국에 적용하면
미국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진행 중이다. SHRM이 2026년 보도한 바에 따르면, 지정학적 긴장으로 인한 퇴직연금 잔고 변동성이 근로자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HR의 대응은 크게 세 갈래다. 금융 리터러시 교육 강화, 개인별 은퇴 시나리오 컨설팅, 그리고 복리후생 커뮤니케이션의 고도화.
한국 맥락에서 이것은 퇴직연금 DC형(확정기여형) 확산과 맞물린다. 호봉제 기업이 DB형(확정급여형)을 유지하면 정년연장 시 퇴직급여 부담도 함께 늘어난다. 직무급 전환과 동시에 DC형 전환을 병행하는 것이 인건비 관리의 양날개가 된다. 다만 이것은 근로자 개인에게 투자 리스크를 전가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투자 교육과 디폴트옵션 설계가 동반되어야 한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2028년, 정년이 61세로 1년 늘어난다. 호봉제 기업에서 이 1년의 비용은 해당 연차 직원 1인당 평균 5,000만~7,000만 원이다. 100명 규모 사업장이라면 연간 5~7억 원의 추가 인건비가 발생한다. 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 신규 채용을 줄이거나, 명예퇴직을 확대하거나, 사업을 축소한다. 어느 쪽이든 조직의 미래 경쟁력을 깎는다.
반대 시나리오도 있다. 직무급 체계를 갖추고 정년연장에 대응하는 기업은 숙련 인력의 기술 전수 기간을 확보하고, 청년 채용과 고령 인력 유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정년연장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되는 조건이다.
결국 이 문제의 답은 단순하다. 시간이 없다. 법은 이미 오고 있고, 준비에는 최소 2년이 걸린다. “올해 하반기에 직무분석을 시작하겠다”고 결정할 수 있는 HR 조직과, “법이 확정되면 그때 대응하겠다”는 HR 조직. 2029년에 두 조직의 풍경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어느 쪽 풍경에 서 있을지는 지금 정하는 것이다.
💡 실무 시사점: 정년 65세 시행까지 남은 시간은 3년 안팎이다. 호봉제 기업이라면 2026년 하반기에 직무분석 착수, 2027년 직무등급·임금밴드 설계, 2028년 시범 적용의 로드맵을 지금 확정해야 한다. 임금체계 전환은 노사 합의가 전제이므로, 직무급 전환의 취지와 방법을 공유하는 사내 TF 구성이 첫 단추다.
#정년연장#호봉제#직무급#임금체계#고령인력#인사제도
참고 링크
-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정보브리프 2026년 제1호 — 고령인력 인사관리 실태와 포괄임금제 과제” (2026)
-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될 때까지 매칭: 청년과 장년을 일자리로 끝까지 연결하는 법” (2026)
- SHRM, “Seesawing Retirement Balances Worrying Workers, But HR Can Help” (2026)
- 헤럴드경제, “65세 정년? 생산성 떨어져… 직무·건강 따져 재고용 선호” (2025)
- 전국인력신문, “정년연장·추정제·포괄임금 대비: 2026년 하반기 노동규제 변화와 기업 대응 전략” (2026)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