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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의 성채, 88%의 벌판 — 이중구조 데이터가 숨기는 것

한국 노동시장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숫자가 있다. 11.9%88.1%. 대기업 정규직과 나머지. 이 비율은 2004년부터 2024년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고, 20년치 보고서가 이 숫자를 반복해왔다. 그런데 같은 데이터를 다른 각도에서 읽으면, 보고서가 쓰지 않은 이야기가 나온다. 대기업 정규직 고용이 “늘고 있다”는 문장과 신규채용률이 “6.5%에 불과하다”는 문장이 같은 보고서에 공존한다는 사실 — 이건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기존 인력이 떠나지 않는 것일 뿐이며, 20년째 반복되는 ‘유연안정성’이라는 처방은 이 구조를 바꿀 수 없다.

한 줄 요약: “12 대 88” 이중구조의 20년 처방 ‘유연안정성’은 자체 데이터가 실패를 증명한다 — 대기업 고용 증가는 신규 채용이 아니라 기존 인력의 장기 체류이며, 진짜 해법은 진입경로 재설계에 있다.

고용이 늘었다는 착각 — 신규채용률 6.5%의 실체

경영자총협회가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원자료를 분석한 결과, 2004년 이후 대기업 정규직 고용은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이 문장만 읽으면 좋은 일자리가 확대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같은 보고서가 제시하는 또 다른 숫자가 있다. 대기업 정규직의 신규채용률, 즉 근속 1년 미만자 비중이 6.5%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6.5%

대기업 정규직 신규채용률 (근속 1년 미만 비중)

경총 — 경제활동인구조사 원자료 분석 (2024)

30.8%

중소기업·비정규직 신규채용률 — 대기업의 4.7배

경총 — 경제활동인구조사 원자료 분석 (2024)

12.14

대기업 정규직 평균 근속연수

경총 — 경제활동인구조사 원자료 분석 (2024)

5.68

나머지 88% 평균 근속연수 — 대기업의 46.8%

경총 — 경제활동인구조사 원자료 분석 (2024)

이 네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 풍경이 달라진다. 대기업 정규직의 고용 “증가”란, 새 사람이 들어온 결과가 아니다. 기존 인력이 평균 12년 넘게 자리를 지키면서, 전체 인원수가 자연스럽게 불어난 것이다. 솔직히 이건 “고용 확대”라고 부르기 어렵다. 정년 60세 법제화가 이 현상을 가속시켰다. 법적 퇴직 시점이 늦춰지면서 대기업 내부 인력의 평균 체류 기간이 길어졌고, 총 고용 숫자는 올랐지만 그 숫자 안에 신규 진입의 여지는 거의 없다. 한편 88%에 해당하는 중소기업·비정규직은 신규채용률이 30.8%다. 사람이 많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많이 나가기 때문에 채용이 잦은 것이다. 근속 5.68년이라는 숫자가 그 회전문의 속도를 보여준다.

57.9%라는 임금 — 격차가 20년째 줄지 않는 구조

중소기업·비정규직의 월 임금총액은 대기업 정규직의 57.9% 수준이다. 대략 1.7배 격차. 이 비율이 2004년 이후 의미 있게 변한 적이 없다는 점이 핵심이다. 최저임금이 매년 올랐고,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됐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논의가 반복됐지만,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다.

왜 그런가.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상승률이 그 바깥의 상승률을 늘 앞질렀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은 대기업에서 매년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이 오르고, 그 인상분이 중소 하청에까지 전달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구조가 단순한 “시장 실패”가 아니라, 원하청 수직계열화가 만들어낸 설계된 결과에 가깝다고 본다. 대기업이 비용을 절감할 때 내부 인건비가 아니라 하청 단가를 조정하는 관행이 20년간 이 격차를 유지시켜온 엔진이다.

사례 — 원하청 임금 전달 구조 자동차 산업에서 완성차 대기업 노조가 연 5~7% 임금 인상을 이끌어내는 동안, 1·2·3차 협력사의 단가 인상률은 연 1~2%대에 머물렀다. 임금 격차는 교섭력의 격차이고, 교섭력의 격차는 기업 규모의 격차로 환원된다. 이 사슬을 끊지 않는 한, 최저임금 인상만으로 57.9%라는 비율이 바뀔 수 없다.

청년이 사라진 12% — 정년연장이 만든 세대 단절

경총 보고서가 제시하는 데이터 가운데 가장 불편한 조합이 있다. 대기업 정규직 내에서 고령자 고용 비중은 급증하고, 청년 고용 비중은 감소했다는 것이다. 전체 고용이 늘었는데 청년은 줄었다 — 이 두 문장이 같은 보고서에 양립한다. 보고서는 이 현상을 “저출생·고령화와 정년 60세 법제화의 영향”이라고 한 줄로 처리한다.

하지만 이건 한 줄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건, 한국에서 “좋은 일자리”라고 불리는 대기업 정규직 자리가 점점 폐쇄적인 내부 시장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규 진입률 6.5%에 평균 근속 12년이라는 조합은, 일단 들어가면 나오지 않고 밖에서는 들어갈 수 없는 구조를 뜻한다. 정년이 연장되면서 기존 인력의 체류 기간은 늘었지만, 그 자리가 비어야 들어갈 수 있는 청년에게는 대기 시간이 길어졌을 뿐이다.

경고 — 세대 간 일자리 교체의 정체 정년 60세 의무화(2016년 시행) 이후 약 10년이 지났다. 대기업 정규직의 평균 연령은 상승했고, 신규채용률은 하락했다. 이건 정년연장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년연장에 맞춰 신규 채용 규모를 늘리지 않은 기업 전략의 결과다. 법은 퇴직 시점을 늦췄지만, 기업은 채용 규모를 동결하거나 줄이는 것으로 응답했다.

결국 12%의 성채는 더 견고해졌다.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오래 머물고, 밖에 있는 사람은 더 오래 기다린다. 이 구조에서 “유연안정성”이라는 처방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사회보험 100% 대 64% — 보호의 이중구조

임금 격차보다 더 날카로운 단층이 사회보험에 있다. 대기업 정규직의 사회보험 가입률, 퇴직급여 수혜율, 상여금 수혜율은 거의 100%에 육박한다. 같은 항목에서 나머지 88%의 수치는 64~75% 사이를 오간다.

~100%

대기업 정규직 사회보험 가입률·퇴직급여·상여금

경총 —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2024)

64~75%

나머지 88% 사회보험 가입률·퇴직급여·상여금

경총 —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2024)

96.6%

대기업 정규직 상여금 수혜율

경총 —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2024)

사회보험 가입률 64%라는 숫자의 이면은 이렇다. 전체 임금근로자의 88%를 차지하는 집단에서, 약 4명 중 1명은 국민연금·고용보험·산재보험 중 하나 이상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실직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고, 다치면 산재보상을 받기 어렵고, 은퇴 후 연금 수급액은 최소 수준에 머문다. 이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고용 형태가 강제하는 구조적 배제다. 5인 미만 사업장, 초단시간 근로자, 특수형태근로종사자 — 법의 적용 범위 바깥에 놓인 사람들이 이 25~36%를 구성한다.

이 숫자가 아프다.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고용 관계”를 전제로 설계됐기 때문에, 고용 관계가 불안정한 사람일수록 안전망에서 멀어지는 역설이 작동한다. 보호가 필요한 사람에게 보호가 가지 않는 구조. 이 역설을 “유연안정성”이 해결할 수 있을까.

같은 진단, 같은 처방, 20년간 같은 결과

경총 보고서의 결론은 “부문별로 맞춤형 유연안정성을 높이는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연안정성(flexicurity)은 덴마크 모델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해고의 유연성과 사회안전망의 확충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논리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다.

문제는 이 처방이 새로운 게 아니라는 점이다. 2004년에도, 2010년에도, 2018년에도, 2024년에도 이중구조 관련 보고서의 결론에는 “유연안정성”이 등장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보고서 자체가 “이중구조가 고착화되었다”고 진단한다. 20년간 같은 처방을 써왔는데 병이 고착화됐다면, 처방이 틀렸거나 처방을 이행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사례 — 덴마크 유연안정성의 전제 덴마크 모델이 작동하는 데는 전제조건이 있다. GDP 대비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LMP) 지출이 2%를 넘고, 실업급여 소득대체율이 80~90%에 이른다. 한국의 ALMP 지출은 GDP 대비 0.6% 수준이며, 고용보험 실업급여 소득대체율은 60%다. “유연성”만 가져오고 “안정성”의 물적 토대는 가져오지 않은 채 처방을 반복해온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핵심이라고 본다. “유연안정성”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소환될 때, 그 무게의 대부분은 “유연”에 실리고 “안정”에는 실리지 않는다. 해고를 쉽게 하자는 주장은 구체적인 법 개정안으로 등장하지만, 사회안전망 확충에 드는 재원 마련은 늘 “장기 과제”로 미뤄진다. 그 결과, “유연성”이 적용되는 대상은 12%가 아니라 88%다. 대기업 정규직은 강한 노조와 기업별 교섭 구조로 여전히 보호받고, 해고 유연화의 실질적 영향은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에 집중된다.

진입경로를 재설계한다는 것

이 보고서의 데이터가 진짜로 가리키는 방향은 다른 곳에 있다. 신규채용률 6.5%라는 숫자는, 대기업이 외부에서 사람을 뽑는 통로가 극도로 좁다는 뜻이다. 이건 해고가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기업이 채용 규모 자체를 전략적으로 축소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자동화, 외주화, 플랫폼 노동의 활용이 그 수단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12% 안에서 사람을 내보내기 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12% 바깥에서도 괜찮은 일자리가 존재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중소기업의 임금 지불 능력을 끌어올리는 원하청 거래구조 개선,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사회보험·복지 격차를 줄이는 보편적 안전망 설계, 기업 규모와 무관하게 적용되는 직무급 체계의 확산 — 이런 방향이 “진입경로 재설계”의 구체적 내용이 될 수 있다.

경총의 데이터는 정확하다. 12 대 88이라는 숫자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정확한 데이터에서 잘못된 처방을 끌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20년간의 데이터가 같은 결론을 반복하는 동안 이중구조가 고착화됐다는 건, 그 결론 자체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신호다. 좋은 일자리의 문을 여는 건, 안에 있는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바닥을 끌어올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 실무 시사점 — HR이 이번 분기에 점검할 3가지:

① 자사의 신규채용률을 계산해보라. 근속 1년 미만 직원 비중이 전체의 몇 %인지. 이 숫자가 5% 이하라면, 조직은 “고용 안정”이 아니라 “경직”의 단계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청년 인재 유입 경로가 막혀 있지 않은지 점검이 필요하다.

② 원하청 임금 격차를 파악하라. 자사와 주요 협력사의 동일 직무 임금 비율을 비교해보라. 격차가 1.5배를 넘는다면, 이건 “시장 가격”이 아니라 교섭력의 비대칭이 만든 구조적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ESG 공시에서 공급망 노동 리스크가 부각되는 시점이다.

③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자사 내에서 점검하라. 초단시간 근로자, 파견·용역 근로자의 4대보험 가입 현황을 확인하라. “법적 의무 범위”만 충족하는 것과 “실질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다르다.

#노동시장이중구조 #유연안정성 #대기업정규직 #신규채용률 #HR전략

참고 링크

작성: 서재홍 | N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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