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가 끝났습니다. 가해자는 주의 한 번을 받았고, HR은 ‘조치 완료’라고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해자는 여전히 같은 팀에 있고, 여전히 직속 상사입니다. 회사를 믿어봤지만 실패한 사람에게 남은 선택지가 하나 있습니다. 형사 고소입니다.
직장내 괴롭힘은 근로기준법 위반인 동시에 형법상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단, 그냥 고소장을 내면 안 됩니다. 죄명을 정확히 골라야 하고, 수사기관이 납득할 증거를 갖춰야 합니다. 특히 모욕죄와 명예훼손죄를 혼동하면 결정적인 기간 함정에 빠집니다.
근로기준법 신고 vs 형사 고소 — 완전히 다른 두 절차
많은 피해자가 이 두 가지를 같은 절차로 혼동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히 다른 절차이고, 동시에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3에 따른 신고는 고용노동부에 제출합니다. 사업주가 조사·처리 의무를 이행했는지를 확인하는 행정 절차입니다. 가해자 개인을 직접 처벌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사업주가 신고를 방해하거나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주면 사업주에게 최대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업주에 대한 제재입니다.
반면 형사 고소는 가해자 개인의 형사책임을 묻습니다.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하면 가해자는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기소되면 형사재판에 회부됩니다. 회사 내부 조사 결과와 완전히 무관하게 진행됩니다. 즉, 회사 조사에서 ‘괴롭힘 아님’ 판정이 나왔더라도 형사 고소는 별개로 가능합니다.
죄명별 형법 적용 기준 — 어떤 행위가 어떤 죄인가
직장내 괴롭힘 가해 행위는 하나의 사건에서 여러 죄명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습니다. 각 죄명의 성립 요건, 법정형, 그리고 놓치기 쉬운 함정을 한눈에 정리했습니다.
| 죄명 | 형법 조항 | 핵심 성립 요건 | 법정형 | 핵심 주의사항 |
|---|---|---|---|---|
| 폭행죄 | 제260조 | 신체에 유형력(물리적 힘) 행사. 직접 접촉 불필요 — 물건 던지기, 책상 치기, 침 뱉기도 포함 | 2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 | 반의사불벌죄 —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공소 불가. 합의 압박에 주의 |
| 상해죄 | 제257조 | 신체에 실제 상해 결과 발생. 골절·타박상·열상 등 진단서 필수 | 7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 | 반의사불벌죄 아님 —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수사·처벌 진행 가능 |
| 협박죄 | 제283조 | 해악을 고지해 공포심 유발. “잘릴 줄 알아”, “집에 찾아간다” 등 구체적 해악 고지 필요 | 3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 | 반의사불벌죄 — 고소 취하 전 합의 압박에 유의 |
| 모욕죄 | 제311조 | 공연성 필수 — 제3자가 인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모욕적 언사. 단둘이 있을 때 폭언은 성립 어려움 | 1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 벌금 | 친고죄 — 범행 인지 후 6개월 내 고소 필수. 기간 지나면 고소권 소멸 |
| 명예훼손죄 | 제307조 | 공연히 사실 또는 허위사실을 적시해 명예 훼손. SNS·단체채팅방 유포, 동료들 앞 인격 비하 포함 | 사실 적시 2년 이하 / 허위사실 5년 이하 징역 | 반의사불벌죄(형법 제312조 제2항) —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 표시 시 공소 불가. 친고죄가 아니므로 고소 기간 제한 없고 제3자 고발도 가능. 단, 합의 시 처벌 중단됨 주의 |
모욕죄 vs 명예훼손죄 — 혼동하면 고소 기회를 잃는다
실무에서 가장 많이 혼동되는 것이 이 두 가지입니다. 핵심 차이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모욕죄는 사실의 적시 없이 모욕적 표현만으로 성립하지만, 명예훼손죄는 구체적 사실을 적시해야 합니다. 둘째, 모욕죄는 친고죄여서 범행 인지 후 6개월 내 고소하지 않으면 고소권이 소멸합니다. 반면 명예훼손죄는 반의사불벌죄(형법 제312조 제2항)여서 고소 기간 제한이 없습니다. 가해자가 사원들 단체채팅방에 ‘이 사람 ○○해서 승진 못 한다’는 식으로 특정 사실을 퍼뜨렸다면 명예훼손죄 적용을 우선 검토해야 합니다.
실무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은 팀 회의 중 상사가 여러 직원 앞에서 욕설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진 경우입니다. 이때 모욕죄(공연성 충족)와 폭행죄(유형력 행사)가 동시에 성립합니다. 모욕죄가 친고죄임을 몰랐다가 6개월이 지나서야 형사 고소를 알아보는 피해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수사기관이 인정하는 증거 준비 5단계
- 녹음·영상 확보 — 통신비밀보호법 제3조는 타인 간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대화 당사자라면 상대방 동의 없이 녹음해도 적법합니다. 스마트폰 기본 녹음 앱으로도 충분합니다. 파일에 날짜·시간·장소 메모를 함께 남겨두세요.
- 메시지·채팅 원본 캡처 — 카카오톡, 이메일, 사내 메신저(Teams, Slack, 카카오워크 등)에서 프로필(이름·전화번호), 날짜, 대화 전후 맥락이 모두 보이도록 캡처합니다. 삭제되기 전에 원본을 저장해두는 것이 핵심입니다.
- 목격자 진술서 — ‘피해자 혼자 꾸며낸 것 아니냐’는 가해자 측 반박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목격자가 서면 작성을 꺼릴 경우, 이름과 연락처를 확보해 수사 단계에서 참고인 출석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 진단서·진료기록 — 우울증, 불안장애, 수면장애,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의 진단서는 피해 사실과 인과관계를 입증합니다. 진단서 발급 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문구가 포함되도록 의사에게 요청하세요. 이 자료는 형사 절차 외에 민사 손해배상 및 산업재해 신청에도 공통으로 활용됩니다.
- 신고이력·회사 처리 결과서 — 고용노동부 신고 접수 확인서, 회사 내 신고 접수·조사 결과 통보서는 피해자가 이미 문제를 제기했고 해결되지 않았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수사기관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수사기관이 진술에서 집중 확인하는 두 가지
증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진술의 신빙성입니다. 수사기관은 진술의 구체성(언제·어디서·누구 앞에서·어떤 말을 정확히 했는지)과 일관성(최초 진술과 이후 진술이 동일한지)을 집중 체크합니다. 사건 직후 기억이 생생할 때 메모를 남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냥 나쁜 사람이었다’가 아니라, ‘2025년 3월 14일 오전 10시, 팀 회의실에서 팀원 5명이 보는 앞에서 쓸모없는 놈이라고 했다’는 수준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자문 현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패턴이 있습니다. 피해자가 회사 내부 조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실망하고 6개월이 지난 뒤 형사 고소를 알아보는 경우입니다. 모욕죄는 친고죄이기 때문에 범행 인지 후 6개월이 지나면 고소권 자체가 소멸합니다. 반면 명예훼손죄는 반의사불벌죄(형법 제312조 제2항)로 고소 기간 제한이 없지만, 가해자 측이 합의를 조건으로 처벌불원 의사 표시를 유도하는 경우가 많아 별도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근로기준법 신고와 형사 고소는 선택이 아니라 동시 진행이 원칙입니다.
고소 후 타임라인 — 피해자가 알아야 할 권리
고소장을 경찰서에 접수하면 수사가 개시됩니다. 일반적으로 접수 후 3~6개월 내 피의자 조사가 이뤄지고, 검찰 송치 후 기소 여부가 결정됩니다. 불기소(혐의없음·기소유예) 처분이 나오면 피해자는 항고(고등검찰청에 이의 제기) 또는 재정신청(법원에 기소 강제 요청)으로 다툴 수 있습니다.
형사 절차와 별도로 민사 손해배상 청구는 언제든지 병행할 수 있습니다. 법원은 장기·반복 괴롭힘에서 위자료를 인정한 사례가 있습니다.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은 과장이 2년간 반복 폭언·욕설을 한 사건에서 위자료 1,200만 원을 인정했고, 청주지방법원은 퇴사 권유와 직무 전환 강요로 우울증 진단을 받은 피해자에게 2,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인정했습니다.
무엇보다 고소 이후 보복성 불이익 조치(인사이동, 업무 배제, 권고사직 등)가 발생하면 즉시 증거를 확보하고 고용노동부에 신고하십시오. 근로기준법 제76조의3 제6항은 신고를 이유로 한 불이익 처우를 별도 범죄로 규정하여 사업주에게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을 부과합니다. 고소 후 오히려 더 심한 보복이 이뤄지는 경우, 이 조항으로 사업주를 동시에 신고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폭언을 녹음했는데 단둘이 있을 때 한 말입니다. 모욕죄로 고소할 수 있나요?
단둘이 있을 때 한 폭언은 공연성(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상태)이 없어 모욕죄 성립이 어렵습니다. 협박죄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거나, 근로기준법상 직장내 괴롭힘 신고 및 민사 손해배상 청구를 함께 검토하세요.
Q. 모욕죄 6개월 기산점은 언제인가요?
피해자가 범행 사실을 안 날부터 6개월입니다. 반복 괴롭힘 행위는 마지막 행위를 인지한 시점을 기산점으로 볼 수 있다는 판례도 있으나, 개별 사안마다 다르므로 즉시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Q.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요?
모욕죄(형법 제311조)는 친고죄여서 6개월 내 고소하지 않으면 고소권이 소멸합니다.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는 반의사불벌죄(형법 제312조 제2항)로 고소 기간 제한이 없고 제3자 고발도 가능하지만,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하면 공소가 불가능합니다.
Q. 폭행죄는 반의사불벌죄라는데, 합의하면 무조건 처벌을 못 하나요?
고소 취하 또는 처벌불원서 제출 전까지는 수사가 계속 진행됩니다. 합의 금액·조건을 명확히 정한 뒤 취하 여부를 결정하세요. 합의 후에도 보복이 이어지면 상해죄(반의사불벌죄 아님)나 협박죄 등 다른 죄명으로 추가 고소할 수 있습니다.
Q. 고소 후 회사에서 인사이동이나 권고사직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즉시 증거를 확보하고 고용노동부에 불이익 조치 신고를 하세요. 근로기준법 제76조의3 제6항 위반으로 사업주에게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고소 사실을 이유로 한 권고사직은 부당해고에도 해당할 수 있습니다.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