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내내 폭언 들으며 일했더니 우울증이 생겼어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했는데 ‘업무와 무관한 개인 질병’이라고 불승인 통보가 왔습니다.” 실무에서 드물지 않게 마주치는 장면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발생한 우울증·적응장애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1항 제2호 다목에 따라 명시적인 업무상 질병입니다. 그런데도 초기 불승인 통보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법령이 없어서가 아니라, ‘증명’이 충분하지 않아서입니다. 이 글에서는 공단 심사에서 실제로 갈리는 증명 포인트 세 가지를 짚어드립니다.
법에는 이미 써 있다 — 그런데도 왜 불승인이 나오는가
산재보험법 제37조 제1항 제2호 다목은 이렇게 규정합니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에 따른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질병”은 업무상 질병입니다.
조항 자체는 명확합니다. 문제는 상당인과관계(업무와 질병 사이의 실질적 연결고리) 입증입니다.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단순히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진술만으로는 업무기인성(業務基因性)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괴롭힘이 실제로 있었고, 그것이 질병의 주된 원인임을 객관적 자료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의 법적 요건 자체도 엄격합니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에 따르면 ①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우위 이용 ②업무상 적정 범위 초과 ③신체적·정신적 고통 부여 또는 근무환경 악화 —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해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됩니다. 단순 갈등, 일시적 불쾌한 언행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핵심 증명 포인트 3가지
포인트 1 — 정신과 진료기록에 원인이 명시돼 있어야 한다
가장 많은 사례에서 놓치는 부분입니다. 정신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아도, 진료기록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스트레스”라는 원인이 구체적으로 기재돼 있지 않으면 공단은 ‘개인 질병’으로 판단할 여지가 생깁니다.
진료 초기부터 담당 의사에게 어떤 맥락에서 증상이 시작됐는지를 상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수준이 아니라, 언제·누가·어떤 방식으로 괴롭혔는지, 그로 인해 어떤 증상이 나타났는지를 의사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진료기록에 반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진단서에도 ‘직무 스트레스 관련 우울에피소드’ 또는 ‘직장 내 갈등 및 괴롭힘에 기인한 적응장애’처럼 원인 맥락이 명시되면 심사에서 크게 유리해집니다.
포인트 2 — 사전 병력 없음을 능동적으로 증명하라
공단이 불승인하는 두 번째 단골 사유는 “기존 정신질환의 자연 경과”입니다. 과거에 정신과 치료 이력이 있으면 공단은 ‘업무와 무관하게 원래 있던 질환이 악화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건강보험 요양급여 내역서(국민건강보험공단 발급)로 괴롭힘 발생 이전에 정신과 진료 이력이 없음을 확인시켜줍니다. 둘째, 설령 과거 병력이 있다 해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법원은 물론 하급심에서도 일관된 흐름은, ‘기존 질환이 있어도 직장 내 괴롭힘이 질병 발생 또는 악화의 주된 원인이라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서울행정법원 2021구단78315 판결도 같은 취지입니다. 핵심은 괴롭힘의 ‘기여도’입니다.
포인트 3 — 괴롭힘 사실 자체를 객관화하는 자료를 모아야 한다
상당인과관계를 증명하려면 먼저 괴롭힘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객관화돼야 합니다. 기억과 진술만으로는 약합니다.
- 카카오톡·문자·이메일: 폭언, 부당 지시, 공개 망신 등의 내용이 담긴 메시지. 날짜가 찍혀 있어 시간적 근접성 증명에도 활용됩니다.
- 녹취 파일: 회의실 또는 1대1 대화 녹취. 불법이 아니며, 증거로서 유효합니다.
- 동료 목격자 진술서: 직접 목격한 동료가 작성한 진술서는 설득력이 높습니다.
- 회사 내 신고 접수 기록: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했다면 접수 번호·처리 결과가 담긴 서류. 단, 회사 조사 결과에서 ‘괴롭힘 아님’으로 결론 났어도 상관없습니다. 공단은 회사 판단과 독립적으로 심사합니다.
- 업무 일지·달력 메모: 괴롭힘 발생 날짜와 내용을 직접 기록한 자료.
이 자료들은 단순히 양을 채우는 게 아닙니다. 시간 흐름에 따라 괴롭힘 → 증상 발현 → 진료’라는 인과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괴롭힘이 시작된 시점과 정신과 첫 방문 시점 사이의 간격이 짧을수록(통상 수주~수개월 내) 업무기인성 인정에 유리합니다.
사업장 규모별 대응 차이
| 구분 | 직장내 괴롭힘 신고 절차 | 산재 신청 시 활용 자료 | 주의사항 |
|---|---|---|---|
| 5인 이상 사업장 | 취업규칙상 신고 절차 (근로기준법 적용) | 사내 신고접수 기록, 조사 결과 서류 | 회사 조사 결과 ‘불인정’이어도 산재 신청 가능 |
| 5인 미만 사업장 | 근로기준법 제76조의2 미적용 (괴롭힘 조항 없음) | 카톡·녹취 등 직접 증거 더욱 중요 | 괴롭힘 조항 미적용이어도 산재 신청 자체는 가능 — 업무기인성으로 접근 |
| 공공기관·공무원 | 인사혁신처·감사원 별도 신고 채널 존재 | 공식 신고 접수번호 + 기관 조사 자료 | 공무원은 공무상 재해(공무원 재해보상법) 별도 적용 |
공단 불승인 후 —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
첫 번째 불승인 결정은 끝이 아닙니다. 순서대로 ①심사청구(근로복지공단 내부, 90일 이내) → ②재심사청구(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 90일 이내) → ③행정소송(재심사 결정 후 90일 이내) 경로가 있습니다.
정신질환 산재는 초기 공단 심사보다 심판·소송 단계에서 인정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료를 보강하고, 의사 소견서를 추가해 인과관계를 재구성하면 결과가 달라지는 사례가 실무에서 계속 나옵니다.
직장내 괴롭힘 산재 사건을 다루다 보면,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진료 초기에 의사에게 ‘직장 괴롭힘’을 원인으로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아서 진료기록에 기재가 빠진 경우입니다. 나중에 소견서를 추가로 받아도, 공단 심사위원은 ‘후에 추가된 기록’이라며 비중을 낮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증상이 시작됐을 때 처음 병원에 가는 그 순간, 원인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 1년짜리 싸움을 단축시킵니다.
전망 — 대법원 흐름은 어디로 가나
최근 법원 추세는 피해 근로자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개인 소인’을 이유로 업무기인성을 배척하는 논리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2021년 서울행정법원 이후 유사한 취지의 판결이 축적되고 있고, 대법원도 산재보험의 보호 목적에 부합하는 해석을 강조하는 흐름입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직장내 괴롭힘 자체가 부정된 사건 — 예를 들어 단순 업무 갈등이나 상사의 정상적인 업무지시로 법원이 판단한 경우 — 에서는 정서적 스트레스만으로는 업무상 재해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괴롭힘의 실체를 입증하는 객관적 증거가 여전히 핵심입니다.
우울증이 생겼다고 무조건 산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 생겼다고 무조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 가지 증명 포인트를 챙기는 것, 거기서 결과가 갈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회사에 했다가 ‘괴롭힘 아님’으로 결론 났어도 산재 신청이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근로복지공단은 회사의 조사 결과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심사합니다. 회사의 부실 조사나 불인정 결론은 공단 심사에 구속력이 없습니다.
Q. 5인 미만 사업장은 직장내 괴롭힘 조항이 적용 안 된다는데, 산재 신청은 어떻게 하나요?
근로기준법 제76조의2 적용 사업장은 5인 이상입니다. 다만 산재보험법상 업무상 질병 인정은 사업장 규모와 무관하게 신청 가능합니다. 업무기인성 증명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Q. 과거에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산재 인정이 어렵나요?
기존 병력이 있어도 포기할 필요 없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 질병 악화의 주된 원인임을 입증하면 인정됩니다. 서울행정법원 2021구단78315 판결이 이를 확인합니다.
Q. 공단에서 불승인 통보를 받으면 이후 절차는 무엇인가요?
심사청구(90일) → 재심사청구(90일) → 행정소송(90일) 순서로 3단계 구제절차가 있습니다. 정신질환 산재는 소송 단계에서 인용률이 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Q. 산재 신청에 필요한 서류는 무엇인가요?
재해경위서, 정신과 진단서(원인 명시), 건강보험 요양급여 내역서, 괴롭힘 입증 자료(카톡·이메일·녹취·진술서)를 기본으로 준비합니다.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