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전기자동차 개발업체 영업본부장(상무이사)이 계약 만료로 퇴사했다. 퇴사한 지 꼭 5일째 되는 날, 그는 같은 업종 경쟁사 전무이사로 출근했다. 입사 당시 쓴 서약서에는 “퇴직 후 2년간 경쟁업체에 취업하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다. 회사가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수원지방법원 2018가단542980)은 전직금지약정이 유효하다고 판단해 손해배상 2,400만 원을 선고했다.
반대의 결말도 있다. 해충방제업체를 퇴사한 서비스컨설턴트는 경쟁사로 이직했다가 5억 원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다. 그런데 법원(서울고등법원 2014나2012698)은 약정 기간을 5년에서 2년으로, 배상액을 5억 원에서 4천만 원으로 각각 줄였다. 약정 자체는 유효지만, 법원이 직접 가위질을 한 것이다.
전직금지약정이 있으면 무조건 막을 수 있을까? 없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할까? 판결들이 일관되게 들려주는 답은 하나다. “약정의 존재보다 약정의 내용이 중요하고, 내용보다 대가(代價) 지급 여부가 결정적이다.”
대법원이 제시한 전직금지 유효 판단 4요소
법원은 전직금지약정의 효력을 판단할 때 아래 네 가지를 종합 형량한다. 이 기준은 대법원이 2010년대 이후 반복적으로 확인해온 공식이다.
- ① 보호할 가치 있는 사용자 이익 — 단순한 업무 노하우가 아닌,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영업비밀보호법) 제2조 제2호에서 정의하는 ‘영업비밀’에 해당하거나, 그에 준하는 보호 가치가 있어야 한다.
- ② 근로자의 퇴직 전 지위 — 핵심 기술·고객 정보에 실제로 접근했는지 여부. 영업보조직과 R&D 책임자는 다르게 취급된다.
- ③ 기간·지역·업종의 합리성 — 전직금지 기간이 2년을 초과하면 무효로 판단하는 사례가 많다. 수원지법 2018가단542980은 2년 이내 부분만 유효, 초과 부분은 무효로 선을 그었다.
- ④ 대가(보상) 제공 여부 — 별도의 금전 보상 없이 서약서만 받은 경우 약정 효력 자체가 흔들린다. 서울고등법원 2014나2012698 사건에서 법원은 월 142,000원 상당의 ‘영업보호장려금’을 대가로 인정했지만, 금액이 미미해 손해배상액 감액의 근거로 삼았다.
이긴 사건 vs 진 사건 — 판결 4건 비교
| 구분 | 사건번호 | 당사자 | 전직금지 약정 | 판단 | 핵심 이유 |
|---|---|---|---|---|---|
| 회사 승 | 수원지법 2019가합10005 | 전자부품 수석연구원 | 희망퇴직 서약서 (2년 전직금지) | 희망퇴직지원금 2.4억 원 전액 반환 | 영업비밀보호법 위반 + 서약서 명시 반환 조건 |
| 회사 승 | 서울남부지법 2010카합188 | 의약품회사 연구개발직 | 있음 | 전직금지가처분 인용 (1일 200만 원 간접강제) | 핵심 R&D 직무 + 경쟁사 동일 분야 이직 |
| 부분 인정 | 서울고법 2014나2012698 | 해충방제업체 서비스컨설턴트 | 있음 (5년·5억 원) | 약정 유효하나 2년·4천만 원으로 감액 | 대가(월 14만 원)가 미미, 기간·금액 과다 |
| 부분 인정 | 수원지법 2018가단542980 | 전기차 영업본부장 | 있음 (퇴직 후 2년) | 2년 이내 유효, 손해배상 2,400만 원 | 퇴사 5일 만에 직접 경쟁사 전무 이직 |
약정 없어도 막을 수 있나 — 영업비밀보호법 제10조
전직금지약정을 별도로 체결하지 않았어도, 퇴직자가 경쟁사에서 회사의 영업비밀(제품 설계도, 고객 DB, 가격 정책 등)을 실제로 사용하거나 공개하면 영업비밀보호법 제10조의 침해금지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경우 약정 위반이 아닌 ‘불법행위 기반 청구’이므로, 약정 없이도 취업 자체가 아닌 영업비밀 사용 행위를 금지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약정이 있으면 경쟁사 취업 자체를 막을 수 있다. 약정 없이 영업비밀보호법만 활용하면, 취업은 막지 못하고 정보 사용을 금지하거나 손해를 청구하는 방식으로만 대응 가능하다. 사용자 입장에서 두 경로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보호 수단이다.
근로자라면 반드시 확인할 것 — 근로기준법 제20조
근로기준법 제20조는 “사용자는 근로계약 불이행에 대한 위약금 또는 손해배상액을 예정하는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판례는 이 조항이 모든 전직금지약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 손해를 입증하지 않고 일정 금액을 자동으로 지급하도록 한 ‘손해배상액 예정’ 약정만이 이 조항에 걸린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6가합557314 사건에서는 학원 강사들이 “우리는 근로자이므로 근로기준법 제20조가 적용돼 전직금지약정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들의 근로자성 자체를 부정(용역계약 판단)해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위약금 수천만 원을 인정했다. 근로자냐 특수고용직이냐에 따라 약정의 효력 판단 자체가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용자·퇴직자 모두를 위한 실무 체크리스트
- [사용자] 약정 체결 시 — ① 보호 대상 영업비밀을 별지에 구체적으로 기재할 것. ② 전직금지 기간은 2년 이내로 설정할 것. ③ 월 급여 또는 별도 수당으로 대가를 명시할 것(금액이 클수록 약정 효력 강화).
- [사용자] 이직 인지 후 — ① 전직금지약정 원본 확보. ② 영업비밀보호법 제10조에 따른 금지가처분 신청과 손해배상 소송 병행 검토. ③ 희망퇴직 서약서에 반환 조건 명시 여부 확인.
- [퇴직자] 이직 전 — ① 서약서·계약서에 전직금지 조항이 있는지 재확인. ② 기간·업종·지역 범위가 과도하게 넓으면 무효 주장 가능. ③ 별도 대가 지급이 없었다면 약정 효력에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생긴다.
현장에서 전직금지 사건을 다루다 보면, 회사가 패소하는 가장 흔한 이유가 대가 지급 조항 누락입니다. 수백만 원짜리 약정서를 만들어놓고도 별도 보상 없이 서명만 받으면, 법원이 약정 효력을 인정하면서도 배상액을 대폭 줄여버리는 결과가 반복됩니다. 약정을 체결할 때는 “얼마를 지급하고 얼마를 지킨다”는 구조로 설계하는 것이 분쟁 예방의 핵심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전직금지약정 없이 경쟁사로 이직하면 처벌받나요?
약정이 없으면 이직 자체는 자유입니다. 다만 전 회사의 영업비밀을 경쟁사에서 사용하면 영업비밀보호법 위반으로 민·형사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Q. 전직금지 기간이 5년인 약정은 전부 무효인가요?
전부 무효는 아닙니다. 법원은 유효한 부분(통상 2년 이내)만 남기고 초과 부분을 무효로 처리합니다(수원지법 2018가단542980).
Q. 희망퇴직금을 받고 서약서에 서명했는데 이직하면 어떻게 되나요?
서약서에 ‘위반 시 퇴직금 반환’ 조항이 있다면 전액 반환 의무가 생깁니다. 수원지법 2019가합10005에서는 2.4억 원 전액 반환이 선고됐습니다.
Q.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도 전직금지약정이 적용되나요?
적용됩니다. 오히려 근로기준법 제20조 보호를 받지 못해 위약금 약정 효력이 더 강하게 인정됩니다(서울중앙지법 2016가합557314).
Q. 전직금지 가처분은 얼마나 걸리나요?
가처분은 본안소송보다 빠릅니다. 서울남부지법 2010카합188 사례처럼 수주 내 결정이 나올 수 있으나, 담보 공탁이 조건으로 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줄 정리 — 전직금지약정은 있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구체적 영업비밀 특정 + 대가 지급 + 2년 이내 기간 세 조건이 갖춰져야 법원에서 온전히 살아남는다.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