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전환, 왜 기술이 아니라 ‘자리’의 문제인가
한국 중소제조업의 디지털 성숙도는 100점 만점에 41.4점이다. AI를 도입해 실제로 활용하는 기업은 18.3%에 불과하다. 수백억을 쏟아붓고도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조직이 여전히 많다. 문제는 기술력이 아니다. 솔직히, 기술은 이미 충분하다. 부족한 건 그 기술을 전략과 연결하는 리더십 구조다.
MIT 슬론경영대학원이 디지털 혁신에 성공한 글로벌 조직들을 분석한 결과, 성패를 가른 핵심은 하나였다. ‘한 명의 CDO나 CTO에게 모든 것을 맡기느냐, 아니면 세 가지 리더십 역할을 분리해 운영하느냐.’ 단일 리더 모델은 사일로를 만들고, 자원 재사용을 막고, 결국 확장에 실패한다. 반대로 역할을 나눈 조직은 스케일업 성공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한 줄 요약: 디지털 전환이 실패하는 진짜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한 명의 리더’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구조에 있다.
세 개의 엔진이 돌아가는 조직
연구가 제시한 프레임워크는 명쾌하다. 디지털 혁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조직에는 세 종류의 리더가 동시에 작동한다.
이니셔티브 리더는 개별 프로젝트를 직접 이끈다. 핵심은 ‘공동 리더십’이다. IT/디지털 전문가와 현업 전문가가 짝을 이뤄, 기술적 실현 가능성과 사업적 타당성을 동시에 검증한다. 단계별로 증거를 축적하면서 투자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듀얼 리더십’ 개념이 한국 기업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우리는 아직도 “IT팀이 알아서 해” 혹은 “현업이 요구사항만 던져” 식의 분리가 너무 흔하다.
공유자원 리더는 여러 프로젝트에서 반복되는 자원을 묶어 관리한다. 클라우드, AI, 사이버보안, UX 같은 기술 영역뿐 아니라 HR, 컴플라이언스, 법무 같은 비기술 영역까지 포함한다. 핵심은 ‘재사용’이다. 프로젝트마다 같은 것을 처음부터 만드는 비효율을 제거하고, 센터 오브 엑설런스를 통해 표준화된 솔루션을 확산시킨다.
포트폴리오 리더는 전체 혁신 과제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재배분한다. 분기마다 전략적 우선순위를 갱신하고, 성과가 부진한 프로젝트는 과감히 정리한다. 이건 좀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정리하는 용기’가 없으면 자원은 좀비 프로젝트에 묶여버린다.
숫자로 보는 구조 설계의 힘
505개
Repsol이 3-리더 구조로 런칭한 디지털 이니셔티브 수 (75% 이상 스케일업 성공)
MIT Sloan / 2024
20%
Repsol의 구조 전환 후 운영 현금흐름 증가율
MIT Sloan / 2024
2,000+건
BBVA가 단일 포트폴리오로 관리하는 디지털 이니셔티브 수 (분기별 10% 정리)
MIT Sloan / 2024
41.4점
한국 중소제조업 디지털 성숙도 (100점 만점)
한국고용정보원 / 2024
숫자가 보여주는 패턴은 분명하다. 역할을 나누고 각 역할에 권한과 자원을 부여한 조직은 실행력과 확장력 모두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낸다. Repsol의 AI·데이터 허브가 전체 이니셔티브 중 60% 이상에 채택된 것도 ‘공유자원 리더’가 설득과 가치 입증을 통해 표준화를 밀어붙인 결과다.
한국 기업이 빠지는 세 가지 함정
연구가 지적한 조직적 실패 패턴 세 가지가 한국 맥락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하나는 프로젝트 초기에 전체 예산을 한꺼번에 배정하는 관행이다. 단계별 증거 기반 투자 대신, 일감을 따내면 끝까지 예산이 따라가는 구조다. 성과 지표도 ‘일정 준수, 예산 미초과, 범위 충족’ 같은 전통적 기준에 머문다. 혁신 프로젝트에 건설 프로젝트의 잣대를 들이대는 셈이다.
다른 하나는 각 프로젝트가 독립 왕국처럼 운영되는 사일로 문제다. A팀이 만든 AI 모델을 B팀이 모른 채 처음부터 다시 만든다. 한국 대기업에서 ‘같은 회사인데 왜 부서마다 다른 클라우드를 쓰느냐’는 한탄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은 디지털 전환의 모든 것을 CDO 한 명에게 몰아주는 구조다. 국내 기업 44.5%가 C레벨 디지털 임원 관할 부서를 단 1개만 운영한다. 한 사람이 전략, 실행, 자원 관리를 모두 쥐면 그 사람의 전문성 바깥 영역은 방치된다.
사례 — Repsol의 듀얼 리더십스페인 에너지 기업 Repsol은 디지털 프로그램에 이니셔티브마다 IT 전문가와 현업 전문가를 공동 리더로 배치했다. 5년간 505개 이니셔티브를 런칭했고, 이 중 75% 이상이 성공적으로 확장됐다. 운영 현금흐름은 20% 증가했다. 핵심은 ‘기술과 사업의 접점’에 사람을 두는 것이었다. CDO 한 명이 아니라, 프로젝트마다 기술-사업 쌍을 만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리더의 내면 설계까지 구조에 넣어야 한다
구조를 바꿔도 리더 개인이 변화를 막는 경우가 있다. 내면가족체계(Internal Family Systems) 연구에 따르면, 리더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건 외부 환경보다 내적 갈등인 경우가 많다. ‘통제해야 한다’는 관리자적 자아, ‘실패가 두렵다’는 방어적 자아가 충돌하면서 혁신적 의사결정이 지연된다.
이건 구조 설계의 마지막 퍼즐이다. 세 가지 리더십 역할을 도입하더라도, 각 자리에 앉은 사람이 역할 전환에 저항하면 구조는 껍데기에 그친다. 기존에 ‘모든 것을 결정하던’ CDO가 포트폴리오 리더로 역할이 축소되었을 때, 그 축소를 수용할 수 있는 내적 준비가 필요하다. 조직 설계와 리더 코칭은 분리된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의 설계 안에 통합되어야 한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우리 조직의 디지털 전환을 이끄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름 하나만 떠오른다면, 그것 자체가 구조적 리스크다. 한 사람의 역량에 조직의 미래를 걸고 있다는 뜻이니까. 아쉽다, 한국 기업 대부분이 아직 이 질문에 한 명의 이름만 대답한다.
역할을 나눈다는 건 권한을 빼앗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짊어져야 했던 불가능한 임무를 해체하고, 각자 잘할 수 있는 곳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Nils Fonstad 연구원의 말처럼, “오늘날의 동적인 환경에서 한 명의 리더나 한 부서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디지털 전환의 다음 단계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술을 운영할 수 있는 리더십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 실무 시사점: 디지털 전환 담당 임원이 1명이라면, 이니셔티브·공유자원·포트폴리오 3개 역할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부터 정의하라. 나머지 두 역할의 공백이 곧 조직의 병목이다. 리더십 구조 재설계는 인사팀과 경영진이 함께 움직여야 할 조직개발 과제다.
#디지털전환#리더십구조#CDO#조직설계#HR전략
참고 링크
- MIT Sloan Management Review, “3 Types of Leaders That Drive Digital Innovation” (2024)
- MIT Sloan Review, “How Leaders Can Move Past Personal Obstacles” (2024)
- 한국고용정보원, “디지털 기반 기술혁신과 인력수요 구조 변화” (2024)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