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가입 대상이 10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된다. 정부가 제도를 넓혀주니 HR은 손 놓고 기다리면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다. 한국 전체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26.5%에 불과하다. 300인 이상이 92.1%인 반면 5인 미만은 10.6%다. 제도가 존재하는데도 가입하지 ‘못하는’ 사업장이 아니라 가입하지 ‘않는’ 사업장이 사각지대의 본체다. 개인적으로는, 이 숫자를 볼 때마다 제도 설계보다 현장 실행력의 문제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한 줄 요약: 퇴직연금 사각지대는 제도 확대만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 HR이 ‘가입 설계자’로 나서야 실질적 노후 안전망이 작동한다.
26.5%라는 숫자가 말해주는 것
2024년 기준 퇴직연금을 도입한 사업장은 전체 도입 대상의 26.5%다. 그런데 이 평균은 실상을 가린다. 대기업은 이미 도입을 끝냈다. 사각지대의 실체는 중소·영세 사업장에 있다. 30인 이하 사업장에서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비율은 여전히 낮고, 이 구간의 근로자 수가 전체 민간 고용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2023년 기준 임금체불 신고액 1조 7,845억 원 중 38.3%인 6,838억 원이 퇴직금 체불이었다는 사실은, 제도 밖에 놓인 근로자가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는지 보여준다.
26.5%
전체 사업장 퇴직연금 도입률
고용노동부, 2024
10.6%
5인 미만 사업장 도입률
고용노동부, 2024
6,838억 원
퇴직금 체불액 (전체 체불의 38.3%)
한국노동연구원, 2023
사각지대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형식적 사각지대 — 아예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사업장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 사각지대 — 제도는 있지만 적립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근로자가 중도인출로 노후 자금을 소진하는 경우다. 한국노동연구원(KLI)이 2025년 발간한 보고서는 이 두 번째 층위에 주목한다. 제도 안에 들어와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퇴직급여가 작동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분석이다.
푸른씨앗, 3년 만에 16만 명 — 그런데 충분한가
정부의 대응책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제도, 이른바 ‘푸른씨앗’이다. 2022년 9월 도입 이후 가입자 약 16만 명, 적립금 약 1조 5,00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수익률도 나쁘지 않다. 2023년 6.97%, 2024년 6.52%, 2025년 8.67%를 기록했다. 민간 퇴직연금의 평균 수익률이 4~6%대인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앞서는 성적이다.
퇴직급여보장법 개정에 따라 가입 대상도 넓어진다. 2026년 7월부터 50인 미만, 2027년 1월부터 100인 미만 사업장으로 문턱이 낮아진다. 현행 30인 이하에서 상당한 확대다. 여기에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입자부담금 계정에 가입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됐다.
사례 — 푸른씨앗 성장 궤적2022년 9월 출범 당시 가입자 0명에서 3년 만에 16만 명, 적립금 1조 5,000억 원을 돌파했다.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제2기 운영위원회를 개최하며 전담운용기관 재선정과 운용체계 고도화를 예고했다. 수익률은 3년 연속 민간 퇴직연금 평균을 상회하고 있다.
솔직히, 수치만 보면 성공적이다. 하지만 16만 명이라는 숫자를 한국 전체 30인 이하 사업장 근로자 규모와 비교하면 아직 초기 단계에 가깝다.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과 현장에서 실제로 가입이 이뤄진다는 것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있다.
중도인출이라는 조용한 구멍
미국에서는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401(k) 중도인출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DC형과 IRP 적립금이 급성장하면서(2025년 3분기 기준 DC형 34.1조 원, IRP 40.1조 원) 동시에 중도인출 건수도 늘고 있다. 문제는 구조적이다. DB형에서 DC형으로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운용 책임이 회사에서 개인으로 넘어갔는데, 재무 교육 없이 운용 권한만 넘기면 단기 유동성 필요에 노후 자금을 투입하는 결과가 나온다.
이건 좀 불편한 진실이다. 퇴직연금을 ‘노후 안전망’이라고 부르지만, 현실에서는 ‘비상금 통장’처럼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중소기업 근로자일수록 주거비·교육비 등 긴급 자금 수요가 높아 적립금을 중도에 꺼내 쓰는 비율이 높다. 제도 안에 들어와 있어도 연금이 연금답게 기능하지 못하는 셈이다.
HR의 역할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
퇴직연금 사각지대를 정부 정책의 문제로만 보는 시각에는 한계가 있다. 법이 사업장에 가입 의무를 부과해도, 실무에서 제도를 설계하고 근로자에게 안내하고 적립 상태를 점검하는 주체는 결국 HR이다.
노사정TF가 20년 만에 합의한 퇴직연금 의무화 로드맵에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포함되어 있다. 운용 주체도 세 갈래로 나뉜다 — 금융기관 개방형 기금(민간), 연합형 기금(신규),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푸른씨앗 확대). HR 담당자 입장에서는 어떤 유형이 우리 사업장에 맞는지, DC형과 DB형의 전환 시점은 언제가 적절한지, 근로자 교육은 어떻게 설계할지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8.67%
푸른씨앗 2025년 수익률
근로복지공단, 2025
1.5조 원
푸른씨앗 적립금 규모
고용노동부, 2026
104조 원
국내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
금융감독원, 2024
특히 5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전담 HR 인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이사나 경영지원 담당자가 급여·4대보험·퇴직금을 동시에 처리한다. 이런 환경에서 퇴직연금 제도 비교, 운용사 선정, 근로자 동의 절차까지 자체적으로 수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외부 노무법인이나 퇴직연금 컨설팅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도는 열렸다, 현장은 아직이다
퇴직연금 사각지대 논의에서 빠지기 쉬운 것이 ‘시간차’의 문제다. 푸른씨앗 가입 대상이 확대되는 것은 2026년 7월과 2027년 1월이다. 하지만 법 시행일에 맞춰 자동으로 가입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사업주가 신청하고,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받고, 운용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 이 각 단계에서 지연이 발생하면 제도 확대의 실질적 효과는 수년 뒤에야 나타날 수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퇴직연금의 사각지대를 좁히는 일은 법 개정으로 시작되지만, 현장의 HR 실무로 완성된다. 제도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제도가 작동하느냐의 문제다. 가입 설계, 적립 모니터링, 중도인출 관리, 근로자 재무 교육 —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지면 퇴직연금은 서류상의 제도로 남는다.
💡 실무 시사점: 2026년 7월 푸른씨앗 확대 시행 전, 50인 미만 사업장 HR 담당자는 (1) 현행 퇴직급여 적립 상태 점검, (2) 기금형 vs DC형 비교 검토, (3) 근로자 대상 제도 안내 절차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제도 확대는 기회지만, 준비 없이 맞이하면 행정 부담만 늘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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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링크
- 고용노동부, “100인 미만 사업장으로 가입 대상 확대 등 제2기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운영위원회 개최” (2026)
-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리뷰 2026년 5월호 — 퇴직급여제도의 사각지대” (2026)
- 헤럴드경제, “중소퇴직연금 ‘푸른씨앗’ 100인 미만까지 확대…16만명·1.5조 성장” (2026)
- 이데일리, “모든 사업장에 퇴직연금 도입…영세·中企 실태조사 착수” (2026)
작성: 서재홍 | N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