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숙련 노동자를 고용하는 건, 엄밀히 말하면 지식을 빌리는 행위였다. 20년차 상담원의 판단력, 15년차 엔지니어의 직관, 10년차 용접공의 손끝 감각 — 이런 암묵지는 매뉴얼로 옮길 수 없었기에 기업은 매달 급여를 지불하며 그 지식을 임대했다. AI가 이 구조를 바꾸고 있다. 통화 녹취, 화면 조작 로그, 업무 처리 패턴을 학습한 AI는 숙련자의 암묵지를 복제 가능한 코드로 전환한다. 빌리던 지식을 이제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 3월 발표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실증 연구는 이 전환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함정을 정면으로 파헤쳤고, 그 함정은 한국 노동현장에서 더 깊다 — AI 시대에 지식을 공유하면 대체되고 숨기면 징계받는 이중 구속이 형성되고 있는데, 한국 노동법에는 이 구속을 풀 도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줄 요약: AI가 숙련 노동자의 암묵지를 코드화하면서 ‘지식 공유 = 자기 대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 시작했다. 한국법은 직무발명은 보호하면서 직무지식은 방치하고 있어, 노동자에게는 공유도 은폐도 위험한 이중 구속이 만들어진다.
5,172명이 증명한 숙련의 반감기
5,172명의 고객상담원을 추적한 대규모 실증 연구가 있다. AI 보조 도구를 현장에 투입한 뒤 벌어진 일은 명쾌했다. 경력 1~2년차 신입 상담원의 생산성이 34% 치솟았다. 같은 도구를 쓴 10년차 이상 숙련 상담원은? 생산성 변화가 거의 없었다. 전체 평균은 15% 향상이라는 그럴듯한 숫자가 나왔지만, 그 숫자 안에 숨은 분배 구조가 핵심이다.
+34%
신입 상담원 생산성 향상폭 — AI 보조 도구 도입 후
고객상담원 5,172명 실증 연구 (2026)
+15%
전체 평균 생산성 향상 — 숙련자 기여분은 미미
고객상담원 5,172명 실증 연구 (2026)
≈0%
숙련 상담원(10년+) 생산성 변화 — 이미 AI의 학습 대상
고객상담원 5,172명 실증 연구 (2026)
연구진은 이 현상을 “가장 유능한 노동자의 모범 실무를 전파한다”고 표현했다. 전파라는 단어 뒤에 숨은 메커니즘은 냉정하다. AI가 숙련자의 응대 패턴, 예외 처리 노하우, 판단 기준을 학습해서 신입에게 실시간으로 주입한 것이다. 숙련자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수년간 체화한 역량이 조직의 디지털 자산으로 복제된 셈이다. 경력급의 존재 이유였던 대체 불가능성이 데이터 파이프라인 하나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빌리던 지식, 소유하는 지식
전통적 고용관계에서 기업은 노동자의 전문성을 기간제로 빌렸다. 암묵지(tacit knowledge)는 본질적으로 이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베테랑 의사의 진단 직관, 숙련 용접공의 손끝 감각, 노련한 영업사원의 관계 판단 — 이런 지식은 문서화할 수 없었고, 해당 노동자가 조직에 있는 동안만 접근 가능했다. 이 구조 자체가 노동자에게 교섭력을 줬다. 내가 떠나면 내 지식도 떠난다. 그래서 기업은 경력급을 지불했고, 숙련자를 붙잡으려 했다.
AI 기반 업무 감시가 이 구조를 근본에서 해체한다. 통화 녹취 분석, 화면 캡처, 키 입력 로그, 의사결정 패턴 추적 — 이 데이터로 학습한 모델은 숙련자의 암묵지를 기업이 소유하고 확장할 수 있는 코드 자산으로 바꿔 놓는다. 임대 계약이 매매 계약으로 전환된 것이다.
사례 — 글로벌 콜센터 산업 다수 글로벌 기업이 숙련 상담원의 통화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하고 있다. 학습된 모델은 신입에게 실시간 응대 스크립트를 제공하며, 일부 기업은 이미 숙련 상담원 비율을 줄이고 신입+AI 조합으로 인력 구조를 재편 중이다. 연구진은 이를 “가르친 뒤 폐기(teach then discard)” 시나리오라 명명했다.
솔직히 이 표현이 거칠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경제학적으로는 정확한 묘사다. 숙련자의 지식이 AI로 코드화되면 그 숙련자의 한계생산성은 신입과 수렴한다. 기업 입장에서 고임금 숙련자를 계속 유지할 경제적 이유가 줄어든다. 의료 분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관찰된다. 영상의학과에서 AI가 숙련 전문의의 판독 패턴을 학습한 뒤, 시간 압박 속에서 전문의의 올바른 판단을 AI가 번복하는 사례까지 보고되고 있다. 숙련이 기술에 종속되는 역전 현상이다.
공유하면 대체되고, 숨기면 징계받는 이중 구속
하버드 연구진이 미국 정규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서베이 실험의 결과는 명확했다. 자신의 업무 데이터가 AI 학습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인지한 노동자들은 지식 공유를 의도적으로 축소했다. 동시에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합리적 자기 방어다. 내 전문성이 내 고용을 위협하는 도구의 원재료로 쓰인다면, 원재료 공급을 차단하는 게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다.
문제는 이 합리적 행동이 한국 노동법 체계에서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는 성실의무가 부과된다. 업무 과정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의도적으로 공유하지 않는 행위는 성실의무 위반, 나아가 업무태만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다수 기업의 취업규칙에는 ‘업무 관련 지식과 기술을 조직과 공유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고, 이를 위반하면 징계 사유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이중 구속이 완성된다. 지식을 성실하게 공유하면 AI가 그것을 학습하여 자신의 대체 가능성을 높인다. 지식을 방어적으로 숨기면 성실의무 위반으로 징계 리스크가 생긴다. 어느 쪽을 택해도 노동자가 불리한 구조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중 구속이야말로 한국 노동법이 AI 시대에 가장 시급히 풀어야 할 미해결 과제라고 본다.
직무발명은 보호하면서 직무지식은 방치한다
한국에는 직무발명보상 제도가 있다. 발명진흥법 제15조는 근무 중 만든 발명에 대해 종업원에게 정당한 보상을 의무화한다. 특허로 연결되는 지적 생산물은 법이 보호한다. 그런데 특허로 환원되지 않는 직무지식 — 숙련자의 판단 패턴, 업무 프로세스 노하우, 문제 해결 직관 — 은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다.
부정경쟁방지법은 영업비밀을 보호하지만, 보호 대상은 기업이다. 기업의 영업비밀을 노동자가 유출하면 처벌받지만, 노동자의 암묵지를 기업이 AI로 추출하는 건 법적 제재 대상이 아니다. 법의 방향이 일방적이다.
제15조
발명진흥법 — 직무발명 보상 의무 규정. 특허 한정, 암묵지는 보호 대상 아님
발명진흥법 (현행)
2026.8.2
EU AI Act 시행일 — 고용 분야 AI를 ‘고위험’으로 분류, 인간 감독 의무화
EU Artificial Intelligence Act (2026)
0건
한국법상 ‘AI 학습용 업무 데이터 수집’을 직접 규율하는 노동법 조항 수
근로기준법·개인정보보호법 교차 검토 (2026.8)
이건 좀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의 개인정보보호법은 세계적으로 강한 편이다. 그럼에도 고용관계 내에서 노동자의 업무 수행 데이터가 AI 학습에 전용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하고 있다. 개인정보 수집·이용 동의 원칙은 있지만, 고용관계의 구조적 불균형 속에서 그 동의가 진정한 자유의사에 기반하는지를 검증하는 장치는 부재하다. EU가 GDPR을 통해 고용 맥락의 동의를 “자유롭게 부여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명시한 것, 2026년 8월 2일 시행된 EU AI Act가 고용 분야 AI를 고위험으로 분류하고 노동자 대표 통지를 의무화한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뚜렷하다.
‘내 데이터는 내 것’이라는 직관의 함정
직관적 해법은 간단해 보인다. 노동자 개인에게 자신의 업무 데이터 소유권을 부여하면 되지 않을까? 하버드 연구진의 분석은 이 직관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개인 소유권은 지식 은폐 문제를 해소하긴 한다 — 내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이 있으니 안심하고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 외부효과가 발생한다.
메커니즘은 이렇다. A라는 상담원이 자기 데이터를 기업에 제공하면, 그 데이터로 학습한 AI는 A뿐 아니라 B, C, D 모든 상담원의 교섭력을 깎는다. 한 사람의 데이터가 전체 노동자 집단의 협상 지위를 약화시키는 구조다. 데이터를 제공한 개인은 보상받을 수 있지만, 그 행위가 동료 전체의 대체 가능성을 높인다.
연구진이 제시한 해법은 집단적 데이터 소유권(collective data ownership)이다. 노동자 집단이 업무 데이터의 소유·활용 조건을 공동으로 결정하는 구조가 경제학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달성한다. 지식 은폐 인센티브가 사라지면서 생산성이 올라가고, AI가 만든 이익의 과실을 노동자 집단이 함께 나누는 모델이다.
주의 — 개인 소유권의 역설 업무 데이터 소유권을 개인에게 부여하면 지식 은폐는 줄지만, 한 사람의 데이터 제공이 나머지 모든 동료의 교섭력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킨다. ‘내 데이터, 내 권리’라는 프레이밍이 오히려 집단적 교섭력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반직관적 발견이다.
이 발견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데이터 주권 논의가 개인 차원에 머물면, 의도와 달리 노동자 집단의 교섭력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집단’이라는 단위가 핵심이다.
교섭 테이블 위의 새로운 의제
이 문제에 가장 먼저 대응한 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었다. 미국 작가조합(WGA)과 영화배우조합(SAG-AFTRA)은 2023년 파업을 통해 AI 관련 조항을 단체협약에 관철시켰다. 핵심은 세 가지다 — AI가 조합원을 대체하는 데 쓰일 수 없다, 디지털 복제물 사용에 동의와 보상이 필요하다, AI 학습에 대한 이의제기 권한이 보장된다. 독일의 사업장위원회 모델은 한발 더 나아간다. AI 도입 전 노동자 대표에게 사전 정보 제공 의무, 모니터링 시스템에 대한 공동결정권, AI 운영 지침에 대한 동의권까지 확보하고 있다.
한국 노동조합의 교섭 테이블에 이 의제는 아직 올라와 있지 않다. 임금, 근로시간, 복리후생이 여전히 중심이다. 그러나 AI가 숙련의 가치를 압축하고, 업무 데이터 자체가 교섭력의 원천이 되는 시대에 ‘데이터 주권’은 임금만큼 중요한 교섭 사항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기업별 노조 체제가 이 맥락에서는 오히려 이점일 수 있다. 산업 전체의 합의를 기다릴 필요 없이, 개별 사업장 단위에서 AI 데이터 활용에 관한 노사 합의를 즉시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사 합의 없는 AI 도입이 가져올 법적 리스크도 무시하기 어렵다. 현행법에 AI 학습을 직접 규율하는 조항이 없더라도,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법리(근로기준법 제94조)나 포괄적 성실교섭 의무를 근거로 한 분쟁이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AI가 숙련자의 지식을 코드화해 인력 구조를 바꾸는 것이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에 해당하는지, 이 논점은 조만간 노동위원회와 법원의 판단 대상이 될 것이다.
💡 실무 시사점 — HR이 이번 분기에 점검할 3가지:
① AI 학습에 활용되는 업무 데이터의 범위를 공개하라. 직원들의 통화 녹취, 업무 로그, 의사결정 데이터가 어떤 AI 모델에 어떤 목적으로 쓰이는지 투명성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EU AI Act의 ‘고위험 AI’ 통지 의무가 글로벌 표준이 되고 있다.
② 취업규칙의 ‘지식 공유’ 조항을 재검토하라. AI 시대에 ‘조직 내 지식 공유 의무’ 조항은 노동자의 대체 가능성을 높이는 양날의 검이다. 지식 공유에 대한 보상 체계를 함께 설계해야 이중 구속을 완화할 수 있다.
③ 노사 합의 없는 AI 도입은 리스크로 인식하라. 명시적 법 규정이 없더라도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법리, 성실교섭 의무를 근거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선제적 합의가 최선의 리스크 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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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링크
- Harvard Business School, “Labor as Capital: AI and the Ownership of Expertise” (2026)
- P4SC4L, “Whose Knowledge Is It? The Legality, Consequences & Governance of Employer Capture of Worker Expertise via AI” (2026)
- HBS AI Institute, “Knowledge Guilds: Who Owns Your Expertise?” (2026)
작성: 서재홍 | NODE